역사/유럽역사 이야기(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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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과 프랑스의 흑역사, 그리고 잔다르크
유럽의 대표적인 라이벌 국가는 영국과 프랑스다.이렇게 라이벌 관계에 있는 것도 역사적인 맥락이 있다.이번 포스팅은 백년전쟁(1337년~1453년)과 프랑스의 흑역사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한다.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랑스의 소녀 영웅 잔다르크.백년전쟁 말기에 프랑스를 지켜낸 소녀입니다.그리고 미국의 뉴올리언스 지명도 프랑스의 오를레앙 지역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이번 포스팅은 백년전쟁의 역사보다 프랑스의 흑역사에 중점을 두고 포스팅 한다.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의 왕비가 된 여인유럽의 모든 전쟁은 결혼과 돈이 얽혀있다.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도 마찬가지다.발단은 보르도 지방의 와인이었다.당시 아키텐 왕국의 보르도 지방에서 와인이 엄청나게 생산이 되었다.프랑스는 이 지역의 와인이 탐났다.와인을 팔아서..
2025.04.03 -
3차 십자군 전쟁의 실패 원인
1187년 예루살렘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서유럽 사람들은 충격에 빠진다.곧바로 3차 십자군 원정대를 소집한다.3차 십자군 원정군을 이끌려는 리처드 1세는 아버지와의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대관식을 통해 정식적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재산을 팔아서 3차 십자군 원정에 나선다. 대관식을 치르고 출정하기 전까지 자신의 나라 잉글랜드에서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잔인한 모습을 보였다.평소 이민자들을 학대 하던 나라에서도 대관식날 만큼은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조심하건만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전쟁을 치르기 위해 아크레성으로 모여든 3차 십자군들.그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있을까? 대관식과 유대인 학살에 대한 내용은 아래의 글을 참고하세요. 사자왕 리처드 1세, 전쟁을 위한 학살이 시작된다 사자왕 리처드 1세, 전쟁을 위한..
2024.03.15 -
사자왕 리처드 1세, 전쟁을 위한 학살이 시작된다
리처드 1세는 아버지를 이기고 왕이 된 남자다. 어머니의 든든한 후원과 프랑스의 필리프 왕의 지원으로 형제들을 이기고 아버지인 헨리 2세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리처드의 머리속에는 오직 전쟁 뿐이었다. 이번 글은 리처드가 왕이 된 영국에서 유대인의 학살이 자행되어 진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리처드 왕자가 아버지 헨리 2세를 이기는 과정은 아래의 글을 참고하세요~~ https://royed2000.tistory.com/32 3차 십자군과 사자심왕 리처드의 등장 2차 십자군 원정은 실패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십자군 내의 분열이었다. 원정 실패 이후 프랑스의 왕은 자신의 아내인 엘레오노르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못난 행동을 한다. 엘레오노르 royed2000.tisto..
2024.03.13 -
3차 십자군과 사자심왕 리처드의 등장
2차 십자군 원정은 실패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십자군 내의 분열이었다. 원정 실패 이후 프랑스의 왕은 자신의 아내인 엘레오노르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못난 행동을 한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교황청에 이혼신청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글을 참조하시길... [역사/유럽역사 이야기] - 2차 십자군 전쟁의 실패 원인 2차 십자군 전쟁의 실패 원인 2차 십자군 전쟁은 1차 십자군 전쟁과 다른 부분이 많다. 1차 십자군은 군중들, 불우한 사람들이 대부분 참여했지만 2차 십자군은 종교계의 실력자와 서유럽 최강의 왕과 황제가 참여한다. 그러 royed2000.tistory.com 한편 2차 십자군의 실패는 서유럽 국가들과 교황청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충격으로 교황인 우르바노 3세가 ..
2024.03.12 -
십자군 예루살렘의 멸망과 고결한 정복자 살라딘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살라딘. 그는 예루살렘을 되찾고 이슬람의 통합을 원했다. 그동안 치루었던 전투는 파괴와 학살의 전쟁이 아니었다. 정복한 지역에서는 군사들의 학살을 금지하고 민심을 달래는 데 주력했다. 상대의 마음을 사는 진정한 승리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승리가 아닌 이슬람의 승리를 기원했다. 가는 곳 마다 백성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이제 예루살렘과의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있다. 살라딘의 행적 속으로 가고자 한다. 주요인물 : 살라딘, 뤼지냥의 기, 샤티몽의 르노, 레몽 3세, 이블린의 발리앙, 알 아딜(살라딘의 동생) 이번 이야기 이전의 상황은 아래의 글을 참조하세요. [역사/유럽역사 이야기] - 예루살렘과 살라딘의 마지막 전쟁 예루살렘과 살라딘의 마지막 전쟁 살라딘은 많은 시련을..
2024.03.11 -
예루살렘과 살라딘의 마지막 전쟁
살라딘은 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이집트는 물론 시리아 전역까지 살라딘의 세력권에 넣었다.이슬람 민중들은 성지인 예루살렘을 수복하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다.사람들의 민심을 얻은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는데...이전의 상황은 아랫글 참조하세요~~주요인물 : 샤티용의 르노, 살라딘, 마누엘 1세 콘네노스, 레몽3세, 살라딘 아들 알 아프, 보두앵 4세 등 [역사/유럽역사 이야기] - 살라딘의 시련과 살라딘 왕조 살라딘의 시련과 살라딘 왕조살라딘의 원래 이름은 살라흐 앗 딘 유수프다. 줄여서 살라딘이라 부른다. 누레딘의 원래 이름은 누르 앗 딘이다. 줄여서 누레딘이라 부른다. 이마드 앗 딘 장기의 아들이다. 이번 포스팅은 이집royed2000.tistory.com샤티용의 르노, 예루살렘에 격..
2024.03.10 -
살라딘의 시련과 살라딘 왕조
살라딘의 원래 이름은 살라흐 앗 딘 유수프다. 줄여서 살라딘이라 부른다. 누레딘의 원래 이름은 누르 앗 딘이다. 줄여서 누레딘이라 부른다. 이마드 앗 딘 장기의 아들이다. 이번 포스팅은 이집트의 재상이 된 살라딘이 시련을 극복하고 이집트 술탄이 되는 과정을 이야기 한다. 주요 등장 인물 : 살라딘, 누레딘, 시르쿠(살라딘의 숙부), 아이유브(살라딘의 아버지), 투란 샤(살라딘의 형) 기타 살라딘 이집트의 재상이 되다. 이집트의 샤와르가 살라딘의 숙부인 시르쿠의 칼에 목이 달아나고 시르쿠는 이집트의 재상이 되지만 얼마 못가서 숨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칼리파는 살라딘을 불러 재상의 자리를 맡긴다. 칼리파는 나이가 어린 소년이었다. 칼리파를 만나고 나온 살라딘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칼리파의 주변 ..
2024.03.08 -
세 번의 이집트 원정과 살라딘의 활약
이번 포스팅은 2차 십자군전쟁 이후 이슬람의 단결을 위한 여정과 예루살렘에 대한 반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그 중에서 세 번의 이집트 원정과 살라딘의 활약들이 하나씩 전개되며 예루살렘과 이집트, 그리고 시리아 지역의 삼각관계에 대한이야기가 펼쳐진다.누레딘의 안티오키아 정복과 레몽의 사망 2차 십자군이 물러나고 약 1년 뒤인 1149년 6월 29일, 시리아 땅 이나브 언덕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누레딘의 군대가 안티오키아를 공격한 것이다.안티오키아의 레몽은 2차 십자군이 물러나면 반드시 누레딘이 올것이라 예상을 하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루이 7세는 레몽을 미워한 나머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레몽은 누레딘의 군대를 홀로 막아선 채 병사들이 다가오면 모두 베었다.그러자 아이유브의 동생인 시르쿠가 출격하여..
2024.03.07 -
2차 십자군 전쟁의 실패 원인
2차 십자군 전쟁은 1차 십자군 전쟁과 다른 부분이 많다.1차 십자군은 군중들, 불우한 사람들이 대부분 참여했지만 2차 십자군은 종교계의 실력자와 서유럽 최강의 왕과 황제가 참여한다.그러나 원정은 실패한다.너무 잘나가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아서일까?아니면 상대를 너무 가볍게 봐서 그런것일까?실패의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에뎃사를 되찾은 이슬람 에뎃사는 1차 십자군 전쟁을 승리하면서 예루살렘을 주변에 4개의 십자군 국가가 태어난다.예루살렘 왕국, 에뎃사 백작령,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작령.(왕국은 국왕이 다스리는 나라다. 백작령은 왕국 아래에 백작이 다스리는 소국을 말한다. 공국(公國)또한 공(公)이 다스리는 소국을 말한다.) 십자군 전쟁 이후 예루살렘을 둘러싼 암투와 배신(아래 ..
2024.03.06 -
유대인의 발전 과정
유대인 모세, 이집트를 떠나다(출애굽기) 유대인과 이슬람의 발상에 대한 이야기는 이전 포스팅에서 다루었다. 아래의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하다. 2024.03.02 - [역사/유럽역사 이야기] - 이슬람의 탄생과 유대인의 갈등 이슬람의 탄생과 유대인의 갈등 이슬람(팔레스타인인)과 유대민족(이스라엘)은 형제 이슬람 국가인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의 이스라엘이 전쟁중이다. 아니 팔레스타인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진행중이다. royed2000.tistory.com 하갈과 이즈마엘이 사막으로 쫒겨나고 이삭의 아들인 야곱이 족장으로 있을 때 엄청난 가뭄이 든다. 모든게 말라 먹을 게 없던 야곱은 식솔들을 이끌고 이집트로 간다. 야곱의 식솔들은 이곳에서 무려 400년 동안 노에로 살아간다. 각종 ..
2024.03.05 -
예루살렘의 배신과 이슬람의 분열
보에몽 죽음의 후폭풍 보에몽의 죽음으로 좋아하는 진영이 있는 반면 당황스러워 하는 진영도 있었다. 정략결혼을 한거지만 보에몽의 딸 콩스탕스를 낳은 알릭스. 자신의 남편이자 딸의 아빠의 죽음 소식에 눈물로 세월을 지새우다 이것이 모두 자신의 아빠가 보에몽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예루살렘에 대한 반란을 획책한다. 혼자의 힘으로 반란군을 이끌 수 없다고 판단한 알릭스는 무슬림의 전쟁 영웅 장기와 손을 잡고 예루살렘과 싸우기로 한 것이다. 이런 정보가 예루살렘으로 새어 나가자 십자군 국가들은 충격에 빠지게 된다. 같은 편끼리 싸우겠다니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알릭스의 아버지인 보두앵 2세는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로 달려가고, 안티오키아의 원로들도 달려와 알릭스를 잡아서 가둬버렸다. 안티오키..
2024.03.05 -
십자군 전쟁 이후 예루살렘을 둘러싼 암투와 배신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과 네 개의 십자군 국가 십자군 전쟁에서 승리해 예루살렘을 점령한(1099년 6월 15일) 십자군. 한동안 약탈과 학살은 이어졌다.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과 지휘자들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1차 십자군의 승리 이후 4개의 십자군 국가가 건설된다. 4개의 지역을 전쟁에 참가한 지휘관들이 나누에 가지는 것이다. 에뎃사 백작령의 보두앵 백작,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공작, 트리폴리 백작령의 레몽 백작, 예루살렘 왕국의 고드프루아. 시간이 흘러 이 나라들을 그들의 후예들이 다스리게 되고 (고드프루아 1100년 사망,레몽 1105년 사망,탕크레드 1112년 사망) 예루살렘을 빼앗긴 이후 무슬림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 무슬림의 반격에 ..
2024.03.05 -
이슬람의 탄생과 유대인의 갈등
이슬람(팔레스타인인)과 유대민족(이스라엘)은 형제 이슬람 국가인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의 이스라엘이 전쟁중이다. 아니 팔레스타인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진행중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슬람(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이스라엘)은 한 형제였다. 이슬람과 유대인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한다. 기원전 2100년 경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 땅에 이사를 해서 살게된다. 아브라함의 아내의 이름은 '사라'. 그러나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어느날 아브라함은 사라의 여종인 '하갈'과 잠자리를 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 그 아들의 이름이 '이즈마엘'이다. 사라는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하갈의 아들이 이즈마엘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
2024.03.02 -
이란의 건국과 전성기, 로마와 클레오파트라
이란의 건국과 중흥, 그리고 페르시아 전쟁 이란 제국을 건설한 퀴로스 2세. 퀴로스는 관용정책으로 이란의 영토를 넓혔다. 이슬람의 관용정책 관련해서는 아래를 참고하면 된다. https://royed2000.tistory.com/15 십자군 전쟁의 원인은 바로 이것! 십자군 전쟁은 중세(1095년 부터 1291년) 유럽에서 벌어진 이슬람과 기독교 교회 간의 종교전쟁이라고 흔히들 얘기한다. 틀린말은 아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단순한 종교 전쟁이 아니다. 종교 royed2000.tistory.com 이렇게 퀴로스의 이란 제국이 성장을 거듭하자 이웃나라 뤼디아의 크로이소스왕은 불안했다. 그래서 그리스의 신에게 신탁을 구했는데 "이란을 침공하면 대제국을 멸망시킨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크로이소스왕은 이란과..
2024.02.28 -
예루살렘에서의 암투와 보에몽의 몰락
예루살렘의 파괴와 학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기 전, 마라트 안 누만의 학살을 통해 십자군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그 여세를 몰아서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있었다.(1099년 6월 15일) 약탈과 학살을 통해서만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슬픈 현실이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십자군들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고 무엇이 인간의 행동인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왜 참전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잃었다. 단지 약탈을 통해 재산을 모으려는 욕심과 기사로서의 명예를 얻으려는 잘 못된 생각에만 관심이 있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벌어진 살육에 일부 십자군 스스로도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3대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지중해 세계 전체가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성지..
2024.02.27 -
'롱기누스의 창'과 십자군의 기사회생
'롱기누스의 창'. 과연 이 창엔 어떤 사연이 있길래 십자군들이 성령이 깃들었고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었을까?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십자군의 학살. 그러나 카르부카가 안티오키아로 오면서 전세는 다시 달라진다. 성 안에 갖힌 십자군들은 굶주림과 공포속에서 대규모 탈영 사태가 일어나고 급기야 피에르까지 탈영을 하게 된다. 탈영을 시도하다 들켜서 안티오키아 대성당으로 도망친 피에르는 보에몽에 롱기누스의 창을 찾으려고 나왔다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 얘길 들은 보에몽은 무릎을 '탁' 쳤다. 보에몽의 머리를 번쩍하고 스쳐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역시 보에몽은 계략에는 빠른 두뇌를 가진 것 같다. 이슬람의 분열과 선동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십자군 피에르는 '롱기누스의 성창'이라고 우기는 유물을 들고 십자군 지휘관들에게 달..
2024.02.25 -
십자군 전쟁 안티오키아 전투(1097년 10월~1098년 6월)
보에몽의 꿍꿍이 1097년 10월. 니케아 함락과 도륄라이온 협곡에서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십자군은 곧바로 안티오키아까지 진격했다. 십자군에 대한 소문을 들은 이곳 사람들은 십자군에게 대한 반감이 아주 컸다. 그도 그럴것이 지나는 곳마다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으니 좋을리가 없었다. 안티오키아 사람들은 십자군에게 먹을 것을 주지도 않았으며 거래 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거기에다 십자군 내부의 분열로 어려운 기간을 보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레몽과 보에몽간의 분열이었다. 레몽 백작은 즉시 공격하여 점령하자고 주장했지만 보에몽은 반대했다. 병사들이 지쳐서 요새를 점령하려면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원정군 입장에서는 속전속결로 이곳을 점령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어찌된 일인지 보에몽은 결..
2024.02.24 -
십자군 전쟁 - 보에몽과 알렉세이오스의 악연
십자군 전쟁 1차 원정에서 가장 전투력이 높고 외교적인 수완이 좋았던 인물이 보에몽이다.보에몽은 십자군 전쟁 이전에 전투력이 높은 기사였지만 새어머니의 배신으로 은둔 생활을 하며 폐인으로 지내다가 십자군 전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모아서 참전하게 된다.바이킹의 후예 보에몽보에몽은 북유럽 바이킹(노르만)족의 후예이다.그의 아버지는 바이킹이었던 '로베르'였다.로베르는 보에몽의 할아버지인 오트빌 남작에게 땅을 받지 못했다. 자식이 12명이나 되서 물려줄 땅이 없었던 것이다.로베르는 남쪽(이탈리아)으로 가서 정복사업을 통해 풍족하게 살게 되었다.얼마나 정복사업에 능력을 발휘했으면 기스카르(족제비)라는 별명을 얻었을까?암튼, 로베르는 싸움 하는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인것 같다.로마를 침공해..
2024.02.23 -
십자군 전쟁 1차 원정 본대의 대반격
십자군 전쟁 1차 원정대의 평민 십자군들이 제리고르돈 요새에서 몰살되면서 평민 십자군 원정이 일단락 되었다. 피에르는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알렉세이오스의 군사 지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콘트탄티노플로 빠져나갔다.그 후 십자군 전쟁 1차 원정대의 본대가 출정한다.이번 포스팅은 고드프루아, 레몽 백작, 보에동 등 기사 십자군들이 활약을 중심으로 이야기 된다. 본격적인 십자군 전쟁평민 십자군이 몰살 당한 지 1년이 지나고 십자군 전쟁의 본대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다.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평화가 찾아왔다고 믿고 있었지만 큰 오산이었다.거기에다 이번 십자군 전쟁 원정대는 오합지졸이었던 평민들과는 달리 전쟁에 이골이 난 기사집단들이었다.1차 십자군 본대의 지휘관은 고드프루아, 레몽 백작, 그리고 보에몽이다. 이 세사..
2024.02.23 -
십자군 전쟁 1차 원정 - 시작되는 학살의 역사
지난 포스팅(십자군 전쟁의 원인)에서 십자군 전쟁 이전의 상황을 이야기 했다. 호전적인 기사 집단이 교회와 갈등을 빚었고 교회는 이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 했다. 이 불만을 성공적으로 외부로 돌리는 과정과 1차 십자군 전쟁의 진행과정 및 결과를 살펴보자. 선동으로 시작되는 십자군 전쟁 1095년 서유럽에 당나귀를 타고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은수자 피에르. '은자' 또는 '은수자'라고 한다. 은자는 속세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 수도자를 말한다. 피에르는 꿈에서 베드로 성인을 만난 이야기를 하고 돌아다녔다. 꿈의 내용은 베드로 성인이 예루살렘을 되찾으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400년 전에 무슬림이 차지한 땅을 빼앗으라는 것이 말이 안된다 생각했다. 하지만 피..
2024.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