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 1차 원정 - 시작되는 학살의 역사

2024. 2. 22. 15:09역사/유럽역사 이야기

지난 포스팅(십자군 전쟁의 원인)에서 십자군 전쟁 이전의 상황을 이야기 했다.
호전적인 기사 집단이 교회와 갈등을 빚었고 교회는 이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 했다.
이 불만을 성공적으로 외부로 돌리는 과정과 1차 십자군 전쟁의 진행과정 및 결과를 살펴보자.

현대의 베오그라드 십자군 전쟁의 상흔이 치유되었길 바래봅니다.

선동으로 시작되는 십자군 전쟁

1095년 서유럽에 당나귀를 타고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은수자 피에르.

'은자' 또는 '은수자'라고 한다.
은자는 속세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 수도자를 말한다.

 

피에르는 꿈에서 베드로 성인을 만난 이야기를 하고 돌아다녔다. 꿈의 내용은 베드로 성인이 예루살렘을 되찾으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400년 전에 무슬림이 차지한 땅을 빼앗으라는 것이 말이 안된다 생각했다.

하지만 피에르는 노숙을 하면서까지 꿈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이런 와중에 피에르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였다.

당시 교회는 기사집단과의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기사집단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좋다고 판단했다. 어느나라나 전쟁은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 최고의 명약인것 같다. 이후부터 교회는 전쟁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고 믿지 않았지만 '거짓말도 계속하면 진실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교회의 선동은 지속되었다.

어느새 무지한 민중들은 전쟁에 찬성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1095년 11월 교황은 공회의를 열어 이슬람과의 전쟁을 위한 원정을 결정하고 참전하는 사람들은 모든 죄가 사하여 질거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까지 했다.

유럽의 각지에서 참전을 위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귀족혈통의 청년들부터 기사들까지 참전에 나섰으며, 가난한 농민, 상인들까지 참전을 하기 위해 모였다.모인 사람들은 옷에 십자가를 새겨서 입었다.

그래서 십자군이라 불리었다. 이렇게 십자군 전쟁을 위한 원정은 시작된다.

여기서 잠깐. 십자군 전쟁의 정치적 동기 첫번째는 교황청의 권력 강화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외교적 목적이다. 투르크족에 압박을 받는 동방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투르크를 선제공격 하겠다는 목적이었다.

이렇게 교회의 정치적 야망으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십자군의 반복되는 학살과 약탈

원정을 준비하면서 십자군 내부에 이상한 파열음이 나왔다. 그동안 귀족들에게 억압을 받던 가난한 평민 십자군들이 귀족들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급기야 귀족 십자군이 평민 십자군에 압도 당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했다.

거기에다 피에르는 은근히 자신이 총 사령관이 될거라 생각했는데 아데마르 주교가 총사령관이 되면서 내분은 더욱 커졌지만 교회의 십자군 전쟁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1096년 봄. 피에르와 평민 십자군이 먼저 출정한다. 그러나 길을 잘못들어 엉뚱한 곳에 당도했다.

그곳은 바로 독일. 하지만 평민 십자군들은 독일 지역의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어떤 역사 학자는 십자군이 유대인을 학살한 이유로 유대인에게 빌린 빚을 갚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다고 한다.

암튼 십자군은 미친 사람들처럼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이것은 서유럽의 반유대사상의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학살당한 유대인들은 21세기 아랍인들을 학살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십자군들은 식량도 없이 출정하였으니 가는 곳 마다 약탈과 학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헝가리의 한 마을을 지나갈 때 일이었다. 작은 마을에 수만명의 병사들을 먹일 식량이 없는건 뻔하다.

사람들이 순순히 식량을 내놓지 않자 다시 약탈과 학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화가난 헝가리 왕은 군사들을 이끌고 십자군의 뒤를 쫒아가 십자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십자군은 대부분의 인원을 잃고 쫒기듯이 도망을 쳤다.

어렵게 도망을 친 십자군들이었지만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다.

베오그라드 맞은편에 있는 '셈린'이라는 지역에서 다시 주민 4천명을 학살한 것이다.

그렇게 학살한 십자군이 베오그라드에 도착했을 때는 베오그라드 주민들이 모두 도망친 이후였다.

십자군은 도망친 사람들의 물건을 가지고 다음 목적지 '니시'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도망친 베오그라드 사람들의 얘기를 들은 니시의 장군인 스쿠타투스의 공격에 대다수의 십자군이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십자군과 동방제국(콘스탄티노플)

그런데 얼마 뒤, 피에르와 흩어진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앞에 다시 모인다. 그 수가 2만명 가까이 되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들인데 그만 뜻을 접고 집으로 돌아가면 좋으련만 무엇이 그들을 다시 학살의 현장으로 불러냈을까? 콘스탄티노플에서도 만행은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황제는 십자군들에게 학살 당하는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피에르에게 제안을했다.

그 제안은 바로 십자군들을 배에 실어 투르크땅에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십자군은 손쉽게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투르크땅으로 이동을 한다.

아마도 십자군들은 더이상 약탈을 할 수 없어서 아쉬움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인 투르크에 도착한 십자군 그곳에서도 십자군은 약탈과 학살을 이어졌다.

어린아이의 사지를 찢어서 죽이기도하고 말뚝을 박아 불에 태워죽이기도 했으며, 인간으로서 상상치 못할 만행을 저질렀다.
심지어 그리스도교인들을 이슬람교인으로 착각해 잔인하게 죽이는 경우도 많았다.

 

몰살당한 십자군 전쟁 1차 원정대

이렇게 약탈과 학살에 재미를 붙인 집자군은 성지탈환은 관심도 없었다.

오로지 약탈에만 열심이었다.이러한 때 피에르가 약탈을 그만두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기사들의 선동으로 무지한 평민 십자군들은 약탈을 이어갔고 많은 십자군들은 피에르 따르지 않게되었다.

이렇게 십자군은 분열이 되고 1096년 10월 강경파는 독자적으로 제리고르돈 요새를 공격한다.

요새는 텅 비어 있었다. 십자군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환호하며 밤새 술을 마셨다. 다음날 십자군들은 알게 되었다.

이것은 함정이었다는 것을. 무장한 투르크인들이 요새를 봉쇄하고 십자군들을 말려죽였다.

봉쇄가 길어질수록 요새 안은 혼란 그 자체였다. 마실 물이 없어 말이나 나귀를 죽여 피를 받아 먹고, 사람의 오줌을 받아서 먹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와중에 지도자들은 십자군의 명예를 지키라 선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요새 봉쇄가 8일간이나 이어졌다. 기사 르노는 자신만 빠져나와 투르트족에 투항을 했다.

요새에 남은 십자군을 몰살하기 위한 투르크인들의 작전이 시작된다.

요새 안으로 첩자를 보내 헛소문을 퍼뜨린다. 그 내용은 기사 르노와 함께 나간 십자군들이 이미 니케아 지역을 점령해서 약탈을 일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요새 안의 십자군들은 분개했다.

그리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밖으로 나온 십자군들은 끔찍한 결말을 맞이했다.

매복해 있던 투르크인들에게 모두 죽임들 당했던 것이다.

평민 십자군들이 아비규환 속에서 몰살을 당할 때쯤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군대를 보내 피에르를 구해준다.

피에르는 목숨을 건지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지만 함께했던 평민 십자군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1096년 봄부터 1096년 10월 21일 까지 그들의 원정은 진행되었다.

이 원정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왜 가난하고 핍박 받던 무지한 농민들이 전쟁을 선택한 것일까?

그들의 죽음을 '순교'라고 부르는데 과연 순교할 가치가 있는 전쟁이었는가?

남편을 잃은 여인들과 아빠를 잃은 아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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