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28. 15:26ㆍ역사/유럽역사 이야기
이란의 건국과 중흥, 그리고 페르시아 전쟁
이란 제국을 건설한 퀴로스 2세.
퀴로스는 관용정책으로 이란의 영토를 넓혔다.
이슬람의 관용정책 관련해서는 아래를 참고하면 된다.
https://royed2000.tistory.com/15
십자군 전쟁의 원인은 바로 이것!
십자군 전쟁은 중세(1095년 부터 1291년) 유럽에서 벌어진 이슬람과 기독교 교회 간의 종교전쟁이라고 흔히들 얘기한다. 틀린말은 아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단순한 종교 전쟁이 아니다.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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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퀴로스의 이란 제국이 성장을 거듭하자 이웃나라 뤼디아의 크로이소스왕은 불안했다.
그래서 그리스의 신에게 신탁을 구했는데 "이란을 침공하면 대제국을 멸망시킨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크로이소스왕은 이란과 전쟁을 벌이지만 결국 이란의 포로가 되었다.
퀴로스는 포로가 된 크로이소스왕이 신탁에 의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는 크로이소스 왕을 정중히 대했다고 한다.
이렇게 뤼디아를 차지한 이란은 기원전 539년에 바빌로니아 제국을 정복한다.
퀴로스는 바빌론에서도 정복자가 아닌 바빌론 문화의 계승자로서의 통치를 하게된다.
이라크 남부에 억류되어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이 일을 계기로 이란과 이스라엘은 우방을 맺기도 했다.(지금은 이스라엘이 이슬람 국가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지만..)
그의 뒤를 이은 캄뷔세스의 정책은 관용적이지 않았고 호전적이었다.
이집트를 점령하고는 이집트 사람들의 관습을 조롱하고 말살하려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떨어뜨린 칼에 자신이 찔려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다레이오스가 관용정책을 부활시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 했다.
이란이 이렇게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점령당한 종족의 종교와 관습, 상업활동 등을 허용하는 관용정책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나라의 정부까지 인정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란도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무리 관용정책을 펼친다 하더라도 이란의 확장은 다른 나라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견제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이란은 그리스와 기나긴 전쟁을 하게된다.
그 당시 아테네는 민주주의가 싹트고 있었던 시기였다.
아테네의 독재자가 이란으로 망명하자 아테네는 반(反)이란 감정이 퍼졌고, 이란 점령지역의 그리스인 독립전쟁에 개입하기로 하면서 이란의 사르디스를 기습침공한다.
그리스의 기습에 화가난 이란의 다레이오스 왕이 그리스와의 전면전을 선포하면서 이른바 '페르샤 전쟁'이 시작된다.
이 전쟁에서 처음엔 아테네가 승리를 거뒀지만 다레이오스왕의 아들이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침공하여 아테네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화가 난 그리스는 이집트 사람들의 독립전쟁을 지원했고 ,이란은 펠레폰네소스 전쟁에 개입을 하면서 전쟁의 소용돌이는 멈추지 않았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랐다. 너무나도 길고 길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이 전쟁의 승자는 엉뚱하게도 마케도니아의 젊은 군주인 이스칸다르, 즉 알렉산드로스(영어식 이름으로 알렉산더)였다.
페르샤(Persia)는 바로 이란!
'중동',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의 이름은 원래 그들 스스로가 부르던 이름이 아니다.
서구에서 자신들이 부르기 편한 이름으로 지어서 부른 것이다.
이집트의 어원인 '아이귑토스'는 그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리스 말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스스로를 '미스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의 이름을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바꾼것이다. 기분 상할 일이다.
아무튼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통일한 페르샤(Persia)는 국가 이름이 아니다. 페르샤인들이 사용했던 이름은 바로 '이란'이다.
이스칸다르(알렉산드로스)와 헬레니즘 문화
알렉산드로스는 스스로 아케메네스 왕조를 계승한 다레이오스의 후계자로 자처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드로스가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자 친구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훔쳐 이집트 땅에서 왕 노릇을 하게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또 알렉산드로스의 황금 석관을 가로채 이집트로 옮기기도 했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 뿐만 아니라 다른 장군들도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중동 각지에서 정복자 행세를 하기에 이르렀다.
안티고노스 왕조는 마케도니아 지역에, 알렉산드로스의 친구였던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란과 시리아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와 유대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이 후계자들은 그리스(마케도니아)의 문화를 자신이 자리 잡은 지역으로 가져왔고 각 지역의 토종문화와 어우러져 여러 문화가 토착화 된다. 이것이 바로 헬레니즘 문화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의 융합은 억지로 해서는 안되는 법.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란과 시리아에 자리를 잡고 호시탐탐 이집트를 노리는 강국을 건설했는데 그 수도가 바로 안티오키아이다.
안티오키아는 '동방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마케도니아(그리스)문화가 뛰어나다는 오만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본토 사람들을 교육으로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무시했으며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했다.
자존심이 상한 이란 사람들은 오만한 셀레우코스 사람들이 못마땅해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인 파르티아 왕조를 세웠다.(이란 사람들은 셀레우코스 사람들을 '살루키'라고 불렀다.)
이란은 이후 중국의 한(韓) 나라와도 교류를 하며 중동 지역의 강국으로 발전해 나갔다.
한편 셀레우코스 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통치하던 이집트의 유대인 지역을 빼앗은 다음에도 그리스 문화를 억지로 주입하려고해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조상들의 문화를 말살당하느니 싸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독립 전쟁이 시작된다.
이 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셀레우코스 왕조는 기원전 63년 결국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멸망당한다.
오만한 왕이 있다면 당연히 그 아래 사람들도 오만했을 것이다.
오만함은 권력에서 나온다. 즉 힘을 믿고 까부는 것이다.
권력(힘)은 또 다른 힘을 부르게 된다. 그래서 반드시 오만함을 응징하는 세력이 생기게 된다.
카이사르의 죽음과 이란의 관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함께 삼두 정치를 통해 수년간 로마의 정계를 장악한 장군이다.
이 카이사르가 툭 하면 주변 국가의 주민들을 괴롭혔지만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높았다.
그 말은 다르게 해석하면 로마의 기득권들에게는 미움을 많이 받았다는 말이다.
당시 로마의 기득권들은 가난한 민중들을 착취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카이사르가 기득권들에게 피살(기원전 44년) 당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의 죽음이 이란과 관계가 있다는 해석이 있다.
기원전 60년 로마의 삼두정치가 이루어지던 시기.
폼페이우스는 전쟁을 잘 한다는 이유로 대장군으로 불렸고, 카이사르는 갈리아 땅을 차지하는 데 성공을 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돈은 엄청 많지만 변변한 성과가 없어서 민중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큰 성과에 눈이 먼 크라수스는 이란을 침략하기로 결정한다.
주변에서는 명분도 없고 무모한 짓이라고 말리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크라수스는 전쟁을 밀어 붙인다.
기원전 53년 이란을 침공했던 로마군은 이란과의 전쟁에서 전투다운 전투도 못해보고 전멸하고 만다.
사망자만 2만 명, 포로 1만 명. 극소수만 겨우 목숨만 건져서 빠져나오는 치욕을 겪어야한 했다.
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배로 기록된다.
크라수스가 죽자 힘의 균형이 깨지고 로마는 내전에 휩싸인다.
이 내전에서 카이사르가 이집트의 폼페이우스를 누르고 로마의 1인자가 된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염문을 뿌리게 된다.
아무튼 카이사르도 이란과 전쟁을 선언하고 종신 독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한편 이란과의 전쟁을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선다.
사람들은 이란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전쟁은 길어질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죽을거라 생각했다.
이 원정으로 권력을 잃고, 가족을 잃을 것을 생각하면 카이사르의 반대편에 서서 그를 제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피살되고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클레오파트라와 로마의 최고 권력자들
이후 로마를 접수한 안토니우스.
중동 순방길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나게 되고 한 눈에 반해서 그녀의 매력에 허우적 거린다.
반대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카리사르와 안토니우스를 구워 삶아서 이집트의 독립과 이익을 도모할 수 있었다.
기원전 36~34년, 이란 침공에 나섰던 안토니우스가 전쟁에 패해 퇴각을 했을 때도 클레오파트라는 자국의 이익을 한 껏 챙겼다. 이렇게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사실들...
최고의 미녀라는 클레오파트라. 사실은 그리 미녀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녀의 매력은 외모 보다는 냉철한 지성과 탁월한 정치력에서 찾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클레오파트라의 코'도 훗날 파스칼이 지어낸 이야기다.
클레오파트라의 독사에 의한 자살설도 증거가 없다.
아마도 옥타비아누스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세상의 이치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법. 클레오파트라의 명성도 한 순간 사라지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젊은 군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그 당시 로마의 권력은 안토니우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로마의 군인들도 모두 그를 존경하고 지지를 보냈고, 동맹국들도 그를 인정하면서 눈치를 보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옥타비아누스는 여론전으로 로마를 선동한다.
그것은 바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자신들의 이익을 가로채고 있다는 선동으로 요녀(妖女)를 처단해야 한다고.
이 선동은 성공을 거둔다. 아주 정교한 여론 조작에 로마 시민들은 이용 당하게 된다.
마침내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로 진격하게 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치고 지중해를 장악한다.
그리고 이집트를 로마의 영토로 합병함으로써 이집트 왕국의 종말을 맞이하고 헬레니즘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로마는 지중해를 장악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아니다.
지중해를 통일한 로마의 민중들은 또 다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 이유는 아래 글을 참고하시라~~
2024.02.21 - [역사/유럽역사 이야기] - 십자군 전쟁의 원인은 바로 이것!
십자군 전쟁의 원인은 바로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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