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10. 14:43ㆍ역사/유럽역사 이야기
살라딘은 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이집트는 물론 시리아 전역까지 살라딘의 세력권에 넣었다.
이슬람 민중들은 성지인 예루살렘을 수복하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다.
사람들의 민심을 얻은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는데...
이전의 상황은 아랫글 참조하세요~~
주요인물 : 샤티용의 르노, 살라딘, 마누엘 1세 콘네노스, 레몽3세, 살라딘 아들 알 아프, 보두앵 4세 등
[역사/유럽역사 이야기] - 살라딘의 시련과 살라딘 왕조
살라딘의 시련과 살라딘 왕조
살라딘의 원래 이름은 살라흐 앗 딘 유수프다. 줄여서 살라딘이라 부른다. 누레딘의 원래 이름은 누르 앗 딘이다. 줄여서 누레딘이라 부른다. 이마드 앗 딘 장기의 아들이다. 이번 포스팅은 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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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티용의 르노, 예루살렘에 격변을 몰고 오다
살라딘과 예루살렘의 전쟁을 이야기 하기 전에 우선 12세기 예루살렘 주변 지역의 정세 부터 알아보자.
1147년 2차 십자군이 물러나고 얼마 뒤. 예루살렘 주변 정세를 격변으로 몰아 넣을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샤티용의 르노다.
샤티용의 르노는 2차 십자군 원정때 십자군을 따라 왔다가 십자군들이 퇴각할 때 떠나지 않고 안티오키아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레몽이 죽자 레몽의 아내인 콩스탕스와 1153년 비밀리에 결혼한다.
한 순간에 안티오키아의 통치권을 거머 쥔 르노.
이 샤티용의 르노가 예루살렘 주변 지역의 파괴와 혼돈을 몰로 올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르노는 안티오키아의 서쪽에 위치한 키프로스 섬을 침공하려 한다.
키프로스 섬은 당시 동로마제국의 섬이었다. 같은 기독교 국가끼리 싸움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과거 2차 십자군 전쟁 당시 동로마제국이 자신을 우습게 봤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전쟁자금이 필요한 르노는 안티오키아의 주교를 찾아가 자금을 요구한다.
기독교 국가끼리 싸우는 걸 반대한 주교.
르노는 주교를 끌고 나가 온 몸에 꿀을 발라 성채 꼭대기에 매달아 놓는다.
온갖 벌레들이 주교의 몸을 괴롭히자 주교는 어쩔 수 없이 전쟁자금을 내 놓게 된다.
파괴와 혼돈의 대명사 샤티용의 르노
이렇게 전쟁자금을 얻는 르노는 함대를 만들어 키프로스 섬을 공격한다.
섬에 상륙한 르노 군대는 주민들을 상대로 학살과 파괴를 시작한다.
죽이다 죽이다 지쳐서 살아 남은 사람은 납치하고, 파괴하다 지쳐서 남은 재물은 모두 빼앗아 갔다.
거기에다 납치당한 사람에게 빼앗을 물건을 비싸게 강매를 해서 돈을 긁어 모았다.
그리고 포로의 몇몇을 신체 일부를 제거한 뒤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보낸다.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해서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엘 1세 콘네노스.
황제는 군사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로 말을 달렸다.
르노는 주변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황제의 군대를 공격하려 했지만 주변국가의 제후들이 모두 배신을 했다.
싸워서 좋을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느낀 르노는 황제 앞에 비열하게 무릎을 꿇고 싹싹빌었다.(1159년)
이렇게 르노 때문에 이 지역에 동로마 제국을 끌어들이게 되고 몇 년동안 시리아 땅엔 전쟁이 없었다.
그래서 살라딘의 어린시절은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살라딘과 예루살렘, 그리고 휴전
르노는 또 다시 전쟁을 위한 원정길에 나선다.
이번에는 이슬람 국가를 침략했지만 포로로 잡혀 16년간 개고생하고 엄청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다.(1160~1176년)
세상은 변해 있었다. 그의 부인 콩스탕스는 세상을 떠났고 전 남편 레몽의 아들 레몽 3세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1177년 11월. 살라딘이 예루살렘의 주력부대가 원정을 떠난 틈을 타서 예루살렘을 공격한다.
성 안에는 기사 수백명 밖에 없었다. 반면 살라딘의 부대는 2만 6천명이나 되었다.
예루살렘의 소년왕 보두앵 4세는 목숨을 걸고 싸울것을 다짐한다.
예루살렘은 샤티용의 르노를 선봉장으로 시작해서 템플러, 이블린의 발리앙 부대와 보두앵 4세까지 가세해 방심하고 쉬고 있던 살라딘 부대를 급습했다.
이 전투가 몽지사르 전투이다.
살라딘 부대는 '걸음아 나살려라'하고 겨우 겨우 도망쳐서 시리아로 돌아왔다.
보두앵 4세의 큰 승리였다.
이듬해 전열을 가다듬은 살라딘은 다시 출격한다.
이번엔 보두앵 4세가 목숨만 건져서 달아난다.
이렇게 두 진영은 일진일퇴의 공방을 펼쳤다.
1180년 싸움에 지친 양 진영은 휴전협정을 맺는다.
휴전협정은 르노에 의해서 깨지고...
휴전협정을 맺고 난 뒤 예루살렘에서는 기사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커졌다.
특히 르노의 반대와 불만이 가장 심했다.
굴욕적인 협상으로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이다.
르노는 협정을 어기고 교류를 위해 왕래하는 이슬람 사람들을 공격했다.
이렇게 협정은 깨진다.
1182년 경 누레딘의 아들이 병에 걸려 사망하자 살라딘은 다마스쿠스로 향한다.
시리아 지역의 알랩포 지역을 접수해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일을 이루자는 의지였다.
한편 협정에 불만을 품은 르노는 1182년 홍해 지역의 해적들을 불러모아 메카와 메디나를 공격해서 무슬림들을 괴롭혔다.
화가난 살라딘은 동생인 알 아딜을 보내 르노를 제압하라고 보낸다.
그리고 자신은 르노의 영지인 카라크로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다.
살라딘 군대에 포위된 카라크 성의 르노.
하지만 운이 좋은 르노.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와 레몽 3세 등 십자군 기사들이 르노를 돕기위해 달려왔다.
살라딘은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 원정 이후 보두앵 4세는 병세가 더욱 깊어져 숨을 거두었다.(1185년)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뤼지냥의 기가 왕위에 오른다.
살라딘 아들 알 아프달의 활약
보두앵 4세의 죽음으로 왕위 계승 문제로 다툼을 벌였던 르노와 레몽3세.
레몽은 예루살렘을 등지고 자신의 영지인 티베리아스로 간다.
화가난 예루살렘의 왕 뤼지냥의 기는 레몽을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출정시킨다.
르노는 르노대로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슬림 상인들을 습격하고 죽였다.
분노한 살라딘. 르노를 자신의 손으로 반드시 처단할 것을 다짐한다.
한편 레몽3세는 고민에 빠진다.
살라딘의 공격과 예루살렘의 공격 모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레몽은 예루살렘의 기왕에게 화해를 위한 편지를 보내고, 살라딘에게는 구원 요청을 하는 편지를 보낸다.
살라딘은 자신의 아들 알 아프달과 군대를 보낸다.
무슬림 군대가 레몽 진영에 들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기사단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레몽은 난처해졌다.
기사들은 성급하게 무슬림들을 공격했다. 그들을 지원할 보병들도 기다리지 않고...
그러다 모두 전멸했다. 뒤늦게 도착한 보병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전투가 크레송 전투였으며, 살라딘의 아들 알 아프달의 첫 활약이었다.
다음은 살라딘과 르노의 마지막 전투와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 그리고 살라딘의 인품을 알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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