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배신과 이슬람의 분열

2024. 3. 5. 10:43역사/유럽역사 이야기

보에몽 죽음의 후폭풍

보에몽의 죽음으로 좋아하는 진영이 있는 반면 당황스러워 하는 진영도 있었다.

정략결혼을 한거지만 보에몽의 딸 콩스탕스를 낳은 알릭스.

자신의 남편이자 딸의 아빠의 죽음 소식에 눈물로 세월을 지새우다 이것이 모두 자신의 아빠가 보에몽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예루살렘에 대한 반란을 획책한다.

혼자의 힘으로 반란군을 이끌 수 없다고 판단한 알릭스는 무슬림의 전쟁 영웅 장기와 손을 잡고 예루살렘과 싸우기로 한 것이다.

 

이런 정보가 예루살렘으로 새어 나가자 십자군 국가들은 충격에 빠지게 된다.

같은 편끼리 싸우겠다니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알릭스의 아버지인 보두앵 2세는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로 달려가고, 안티오키아의 원로들도 달려와 알릭스를 잡아서 가둬버렸다.

안티오키아의 성문을 열고 보두앵 2세 군대가 들어오면서 이 반란은 끝이 난다.

하지만 딸의 배신으로 상심한 보두앵은 결국 1131년 숨을 거둔다.

 

한편 예루살렘에서는 멜리장드와 풀크 공작과의 사이에서 또 다른 혼란이 일어난다.

멜리장드와 위그의 불륜 소문이 예루살렘에 퍼진 것이다.

이들의 불륜을 알게된 풀크 공작과 멜리장드는 왕국의 지배권을 두고 암투를 벌인다.

그리고 위그는 다른 기사들로 부터 결투 신청이 끊이지 않았고 위험을 감지한 위그는 망명길에 오른다.

위그는 이집트로 향하는 배 위에서 누군가에게 목숨을 잃는다.

 

위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예루살렘의 여론의 방향이 바뀌었다.

풀크는 위그의 죽음에 대해 부인했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멜리장드에 대한 동정여론이 커지게 되고 풀크는 정치적으로 고립되고 말았다.

 

무슬림의 분열

 

티크리트(지금의 이라크 땅)에 시루크와 그의 형인 아이유브가 있었다.

두 형제는 십자군 국가간 분열로 혼란스럽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빼앗긴 무슬림의 땅을 되찾을 수 있는 절로의 기회.

용맹스런 이마드 앗딘 장기가 전열을 갖추어 공격하면 쉽게 이길거라 생각했지만 장기에게 원한을 품은 칼리파가 이마드 앗딘 장기를 공격하는 바람에 이마드 앗딘 장기는 위험을 피해 티크리트로 도망을 친 것이다.

한때 술탄과 칼리파의 싸움에서 장기가 술탄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칼리파의 원한을 사게 된 것이다.

결국 무슬림들끼리 싸우느라 침략자들을 응징할 기회를 빼앗긴 것이다.

 

아이유브와 시루크 형제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장기.

그는 두 형제에게 함께 십자군 침략자를 몰아내자고 제안을 한다.

동생 시루크는 장기의 뜻에 동의를 하지만 형인 아이유브는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바로 비루즈와의 관계 때문에 마음대로 군사를 움직일 수 없는 까닭이 있기 때문이었다.

 

비루즈의 배신과 살라딘의 탄생

 

비루즈와 아이유브 집안을 오랜동안 친하게 지냈다.

비루즈는 재능이 넘쳐 사람들의 신망을 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역 권력자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면서 권력자에게 거세를 당하는 수모를 격는다.

비루즈를 살려준 아이유브는 비루즈를 바그다드에 데려 가서 그가 환관이 되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비루즈는 바그다드에서도 신망을 얻어 고속으로 승진을 했다.

이렇게 두 집안은 서로 의리로 뭉쳐 있었다. 그래서 장기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비루즈가 아이유브에 배신을 한다.

그것은 자신이 싫어하는 장기를 아이유브가 살려준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해가 지나고 1138년 아이유브의 아들이 태어난다.

그 아이가 바로 살라딘이다.

 

살라딘이 태어난날 어떤 여인이 시루크를 찾아와 하소연 한다.

어떤 병사가 자신을 모욕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시루크는 성문 관리자인 이스파살라와 다투다가 그를 죽이게 된다.

살라딘이 태어난 날 일어난 이 일은 안좋은 징조였다.

이 사건으로 비루즈는 아이유브와 시루크 형제는 추방시킨다.

이 소식을 들은 이마드 앗딘 장기는 두 형제를 자신이 있는 모술로 모셔간다.

 

풀크의 음모와 안티오키아

여론이 점점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한 풀크.

풀크는 프랑스에서 레몽이라는 사람을 끌여들여 알릭스가 있는 안티오키아로 보낸다.

그리고 9살 밖에 되지 않은 알릭스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알릭스를 견제하는데 성공하지만 어린 아이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풀크에 대해 여론이 더욱 안좋아졌다.

안좋은 여론을 가라앉히는데 가장 좋은 건 역시 전쟁.

풀크는 대규모 원정길에 나서는데 이것이 수난의 시작인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풀크의 대규모 원정에 주변 이슬람 국가들은 감히 덤비지 못했다.

그러나 풀크의 대규모 원정에 쾌재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모술의 장기와 아이유브 형제였다.

 

요안니스의 출현, 혼돈의 이슬람

 

장기는 예상과 달리 풀크의 군대를 공격하려 나선다.

예상을 하지 못한 풀크는 우와좌왕하다가 몽페랑 요새로 도망가고 갇혀버린다.

레몽의 지원군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기에게 포위당한 풀크는 레몽이 도착하기 직전에 무조건 항복하는 치욕을 겪게된다.

 

요새에서 빠져나온 풀크는 또다른 수난을 겪는다.

그것은 바로 안티오키아 땅을 찾으러 온 황제 요안니스 때문이다.

요안니스는 동방제국의 황제 알렉세이오스의 아들.

 

과거 보에몽1세가 두라초 공방전에서 패하고 알렉세이오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싹싹 빌었다.

알렉세이오스는 보에몽의 목숨을 살려주고 안티오키아를 귀속시켰다.

그 이후 알렉세이오스가 죽고 그의 아들 요안니스가 나타나 안티오키아의 지배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요안니스와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던 풀크는 협상을 한다.

협상 내용은 바로 안티오키아를 요안니스에게 줄테니 주변의 무슬림들의 땅을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튄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무슬림들은 분열이 되어 하나로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요안니스도 잘 알고 있었다.

요안니스가 제안을 수락하고 무슬림들은 그 소식에 경악을 한다.

 

이마드 앗딘 장기의 지략, 요안니스의 퇴각

 

요안니스가 장기에게 제안을 한다.

자신들의 주변 이슬람 원정을 눈감아 준다면 다마스쿠스를 장기에게 주겠다는 것이었다.

무슬림 간의 분열을 잘 알고 있던 요안니스기에 가능한 제안이었다.

요안니스의 제안에 장기는 손해 볼 장사가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서 다마스쿠스를 지배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아이유브가 반대하고 나섰다.

이슬람 사람들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에 반대한 것이었다.

명분과 신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장기는 아이유브의 의견에 따라 1138년 동로마 제국과 샤이자르 전투를 벌이게 된다.

 

전투가 벌어지자 장기는 레몽과 풀크에게 밀사를 보낸다.

자신들과 동방의 전투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동방의 원정이 성공해도 안티오키아는 레몽의 땅이 될 수 없으니 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이다.

안티오키아가 동방의 손에 넘어가면 예루살렘도 위험할테니 모두 가만히 있으라는 것.

풀크와 레몽은 괜히 개입했다가 피를 보는 것 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결국 요안니스는 퇴각을 하게 된다.

이마드 앗딘 장기는 이간계(離間計)를 이용해서 가볍게 승리를 거두었다.

 

풀크의 죽음과 전쟁의 기운

 

이렇게 전쟁이 마무리 되면서 장기는 무슬림의 영웅이 되고 요안니스는 화가 잔뜩 났으며, 풀크는 놀림감이 되었다.

풀크는 이번 원정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명예도 잃었고, 예루살렘 민중들의 지지도 잃었고, 멜리장드와의 권력 싸움에서 뒤처지게 되면서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말을 타다 낙마한 풀크는 안장에 머리를 부딪쳐 의식을 잃고 쓰러져 며칠 뒤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단독으로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된 멜리장드.

그녀는 전쟁 보다는 평화와 공존, 문화 사업에 매진하려 했다.

그러나 그건 자신의 생각일 뿐.

남의 땅을 빼앗아 놓고 평화를 바란다는게 처음부터 잘 못된 생각일 수 있다.

그 땅을 빼앗긴 사람들은 뿌리깊은 원한과 증오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과 주변의 긴장을 더욱 높아져 가고 얼마 후 모술의 장기의 군대가 에뎃사 백작령(십자군 국가 중 하나)을 공격해 되찾는데 성공했다.

이 사건으로 주변의 기독교 국가들은 긴장을 하게 되고 유럽에선 반 이슬람 정서가 또다시 확산되면서 예루살렘으로 2차 십자군들이 모여든다.(1147년)

 

눈길을 끄는 것은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와 왕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엘레오노르는 레몽과 사랑에 빠지고 루이 7세는 질투의 불길에 휩싸이는데...

다음 포스팅에서 얘기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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