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이릉대전에서 잃은 촉나라 인재들

2024. 4. 16. 18:05인물이야기/삼국지 인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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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의 3대 전투는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 이다.

이 전투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단순히 큰 전투였다는 의미를 넘어 대전의 결과가 남긴 것들이 너무나도 큰 변화를 가지고 온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릉대전에서 패한 유비의 촉나라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유비가 숨을 거두고 수많은 인재들을 잃었다.

촉나라의 2세대 인재들까지 잃음으로서 이후 제갈량이 천하 통일을 위한 전쟁에서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오늘은 이릉대전에서 잃은 촉나라의 인물들을 정리한다.

 

마량. 출처 : 나무위키

제갈량과 의형제(?) 마량

 

마량은 형주 양양군 의성현 출신으로 마량을 포함한 다섯 형제 모두가 재능이 뛰어나고 명성이 높았다.

다섯 형제 중에서 백미가 가장 낫다고 했는데, 여기서 백미는 마량을 칭하는 것으로 마량의 눈썹이 하얗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었다.

이후, 유비가 형주를 평정한 다음 수많은 인재들을 불러 모을 때, 마량은 유비의 부름을 받아 종사에 임명되었다.

유비가 입촉했을 때 형주에 남았고, 나중에 제갈량 등이 유비를 지원하가 위해 촉으로 향했을 때도 형주에 남아 관우를 보좌했다.

 

건안 19년(214년).

유비의 군세가 1년간의 공성전 끝에 유장의 아들인 유순과 장수, 장임이 지키던 낙성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마량은 하늘의 복이 내린것이라는 내용의 축하 편지를 제갈량에게 보낸다.

이 편지에서 제갈량을 '존형' 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것은 제갈량과 마량이 의형제를 맺었거나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유비가 형주를 평정하자 마량은 촉으로 불려가 좌장군연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유비의 명을 받들어 오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된다.

마량은 제갈량을 찾아가 자신이 오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었으니 추천서를 써달라고 말한다.

그러자 제갈량은 마량에게 추천서를 직접 써 오라고 얘기하고 마량은 자신이 직접 쓴 추천서를 제갈량에게 보여준다.

초고를 본 제갈량은 만족해했으며 마량은 자신이 쓴 소개글을 들고 오나라로 출발한다.

오나라에 도착한 마량은 손권에게 제갈량이 쓴 것으로 가장한 자신의 소개글을 보여주었고, 손권은 그 소개글을 보고는 마량을 공경하며 좋은 대우를 해준다.

 

장무 원년(221년). 유비는 관우의 복수와 함께 형주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오나라 정벌에 나섰고, 이때 마량도 참전하여 유비를 수행했다.

장무2년(222년). 유비는 마량에게 명을 내려 오계만이들을 포섭하게 했는데 마량은 무릉지역으로 가서 오계만이들을 위로하며 성공적으로 임무를 해냈고, 그 결과로 모든 오계만이의 우두머리가 유비의 인수를 받은 뒤 유비에게 협력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릉대전은 유비의 패배로 끝났고, 마량도 전투에 휘말려 죽게된다.

당시 마량의 나이 서른 여섯 살이었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가 마량을 평가하기를 '마량은 정직하고 성실하여 훌륭한 선비로 칭찬 받았다. 그는 촉나라의 훌륭한 신하이다'라고 했다.

 

정기. 출처 : 나무위키

원칙주의자 정기

 

정기는 익주 파서군 낭중현 출신으로 유장의 휘하에서 파서군(탕거군) 한창현의 장으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정욱은 파서태수 방희의 군리로 있었다.

당시 파서태수 방희는 천하가 소란스러워 지자 수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수많은 병사들을 소집 했다.

그런데 평소 방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물이 유장에게 방희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참언을 고했다.

이에 유장은 방희를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방희는 유장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정욱을 정기에게 보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함과 동시에 군대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다.

 

서신을 받은 정기는 난감했다.

군대를 지원하면 자신 또한 반역의 의심을 받을 수 있고 군대를 보내지 않으면 방희에게 찍힐 것이기 때문이다.

정기는 정공법을 선택한다.

정기는 방희가 군사들을 모은 것이 방어를 위한 것임을 유장이 알 것이니 성의를 다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방희에게 보낸다.

즉 군대를 보내줄 수 없다는 서신을 정중히 보낸 것이다.

 

그리고 아들인 정욱에게는 자신은 유장에게 충절을 다할테니 정욱은 파서의 군리이니 태수 방희를 위해 힘을 쏟으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방희는 정기가 자신을 도와주려 하지 않자 이번에는 정기를 협박한다.

"당신 아들이 지금 우리 군에 있습니다. 그대가 나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 집 안에 화가 미칠 것입니다" 라고 했으나,

정기는 "과거 악양은 위나라(춘추전국시대)의 장수가 되어 자식의 살을 끓인 국을 먹었는데, 이는 부자간의 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대의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또 내 자식의 살로 국을 끓인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것을 먹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방희는 정기가 자신을 위해 군대를 지원해 주지 않을 것을 알았고, 할 수 없이 유장에게 깊이 사죄를 하였는데,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유장은 정기를 매우 칭찬하며 그를 강양군의 태수로 임명했다.

이후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게 되자, 정기는 유비 휘하로 들어갔고 유비가 오나라를 정벌할 때 유비를 수행했다.

그러다 유비가 육손의 군대에게 패하여 퇴각하게 되었을 때, 휘라 병사가 정기에게 적의 추격병들이 당도했으니 도망가자고 말했으나 정기는 일찌기 적 때문에 달아난 적이 없다고 말하며 직접 선봉에 서서 싸웠다.

그러나 오나라 추격군들이 계속해서 증원 되면서 결국엔 전사했다.

 

부융. 출처 : 나무위키

대를 이은 충성, 부융

 

부융은 형주 의양 출신으로 이릉대전의 별독으로 참전하였는데, 유비가 육손의 공격을 피해 도망칠 때 휘하 병사들과 함께 후방에 남아 유비가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도록 오나라의 추격군을 끝까지 저지했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휘하에 있던 병사들이 전원 전사했고 이에  오나라 장수가 부융에게 투항을 권했으나 부융은 '오나라의 개들아! 한 나라의 장군이 되어 어찌 항복하는 자가 있겠는가' 라고 욕을 하며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충심은 아들인 부첨에게도 이어져 훗날 종회가 촉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을 때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성문이 열리게 되었음에도 부첨은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촉서의 따르면 이러한 부자의 충심이 널리 알려졌는지 삼국지 시대를 통일한 사마의 손자인 사마염이 부융과 부첨의 일을 언급했다고 한다.

 

풍습. 출처 : 나무위키

풍습

 

풍습은 형주 남군 출신으로 유비가 형주를 평정하면서 그의 밑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유비가 입촉했을 때 유비를 수행하며 함께 촉으로 들어갔으며, 유장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유비가 오나라를 정복할 때 풍습은 대도독에 임명되어 여러 군대를 통솔했으며 이릉대전 초기에 무현과 자귀현에 주둔하고 있던 육손 휘하 장수인 이이 등을 격파하는 공을 세우며 유비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승리로 인해 방심을 했는지 풍습은 적을 경시하여 공격의 시기를 잃고 위험을 초래했다.

'재난은 한 사람으로부터 생겨나 확대된다'는 기록까지 있는 것으로 봐서는 유비군이 효정 지역에서 육손의 화계로 인하여 혼란에 빠져 각개격파 당했던 주 원인에는 풍습의 방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풍습은 육손이 이끄는 오나라 군대의 맹공에 맞서다 오나라 장수 반장의 부하에게 목이 베어졌다.

 

장남

 

장남은 형주에서부터 유비를 수행하였으며, 유비가 입촉을 할 때 함께 촉으로 들어갔고 풍습과 마찬가지로 유장군과의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안목이 뛰어난 유비가 오나라를 정벌할 때 선봉장으로 삼은 것을 보면 용맹함과 무용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쉽게도 장남의 기록은 전무하며, 육손이 화계를 쓰며 공격해 올 때 풍습 등과 함께 전사했다고 한다.

 

사마가

 

삼국지 연의에서 의사 마가는 우리나라의 용장인 감녕을 죽이는 등 이름 대전에서 활약을 하지만 이는 모두 픽션이다.

실제 역사에서의 사마가는 이릉대전에 참전했다가 육손의 군대에게 패하여 죽었다는 것과 이민족들의 왕이라는 것 이외에는 기록이 전무하다.

 

왕보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왕보는 익주 광한군 처현 출신으로 인물평가를 하는 것과 어떠한 사안에 대해 토론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왕보는 처음에는 유장의 수하였으나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유비의 밑으로 들어갔고, 익주 왕군면 죽현의 장으로 임명된다.

이후 유비가 오나라를 토벌할 때 유비를 수행하였으나 유비의 군대가 패퇴하면서 목숨을 잃는다.

 

투항한 장수들

 

이릉대전 당시 황권은 후방인 이릉(북쪽)에 주둔하여 혹시 모를 위나라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는데 유비의 군대가 육손의 공격에 매우 빠른 속도로 무너지는 바람에 퇴로가 끊겼다.

이대로라면 황권은 개죽음을 당하거나 오나라에는 항복을 해야하나 차마 그럴수는 없었기에 휘하 사람들을 이끌고 위나라에 항복을 했다.

<위서>에 따르면 이때 항복한 사람들 중 42명이 열후에 봉해졌고 장군, 낭장에 임명된 인물만 100여 명이었다고 하니 촉나라 입장에서는 중요한 인재들을 그대로 위나라에 갖다 바친 꼴이었다.

참고로 방통의 동생인 방림도 이때 위나라에 항복했고 관직이 거룩태수(기주 지역)까지 올랐다.

이외에 오나라에 항복한 장수들도 있었다 하니 촉나라는 이릉대전을 통해 수많은 2세대 인재들을 잃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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