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는 이 사람 때문에 제갈량을 만났다

2024. 4. 15. 18:44인물이야기/삼국지 인물 이야기

삼국지 인물 중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물이 제갈량이다.

정사에서든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 연의에서든 제갈량의 활약에 대해서 부정할 수 없는 임팩트가 있다.

유비가 만약 제갈량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읽은 삼국지가 존재했을까?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는 장면이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었을까?

이 삼형제의 기록은 얼마 가지 않아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제갈량을 유비에게 소개한 인물이 있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서서의 뚜렷한 활약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삼국지 연의에서 서서가 계략으로 위나라 대군을 물리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나관중이 지어낸 이야기다.

제갈량의 등장은 이후에 펼쳐질 역사가 드라마틱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큰 사건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삼국지에 빠져들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서서라고 생각한다.

짧지만 서서에 대해 알아보자.

 

서서. 출처 : 나무위키


서서, 칼을 버리고 책을 잡다

 

<위략>에 따르면 서서의 원래 이름은 서곡이라고 한다.

서서는 어렸을 때부터 임협과 격검을 좋아한데다 엄청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흙수저였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이 맞물려서 나쁜 길을 걷게 된다.

중평 말년(188~189년)에 서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원수를 갚아 주고 얼굴에 흰 흙을 바르고 머리를 흩뜨린 채 달아나다가 관원에게 붙잡히게 된다.

서서를 붙잡은 관원이 그의 이름을 물었으나 서서는 입을 닫고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관원은 서서를 포박한 채로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그의 정체를 알아내려 했으나 그를 알아보는 자가 없었다.

다행히도 서서는 관아로 끌려가기 전에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서서는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자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곧바로 검과 극을 버리고는 길을 떠나 학문에 힘쓰게 된다.

하지만 서서가 처음 정사(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마련한 집)로 왔을 때, 다른 유생들은 그가 과거에 도적질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와 말도 섞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서서는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는 뜻에서 오히려 몸을 낮추고 매번 아침 일찍 일어나 홀로 청소를 하며, 거동할 때는 항상 남의 뜻을 먼저 헤아렸다.

그리고 열심히 경서 공부를 하여 그 뜻과 이치를 정확하게 이해했으며, 같은 군 출신인 석도 라는 인물과 친분을 쌓게 된다.


서서, 제갈량과 유비의 인연을 맺어주다

 

초평 연간(190~193년)에 중원에서 전란이 일어나자 서서는 석도와 함께 남쪽으로 도망쳐 형주로 간다.

그곳에서 서서는 제갈량을 만나게 되었고, 제갈량과 친구가 되어 함께 공부를 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유비가 형주로 와서 신야에 주둔하게 된다.

서서는 유비의 뛰어난 명성을 이미 듣고 있었기에 유비를 찾아가 유비를 만나보고는 유비의 휘하에 들어간다.

유비는 또한 서서를 매우 아끼고 중하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유비는 제갈공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서서를 블러 제갈공명에 대해 물었다.

서서는 유비에게 '제갈공명은 와룡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보고자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유비는 서서가 제갈공명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서서에게 제갈공명을 데리고 오라고 명한다.

하지만 서서는 고개를 저으며 유비가 직접 찾아가 만나야지 억지로 몸을 굽혀 오게해서는 안된다고 조언한다.

이 조언을 들은 유비는 삼고초려를 하여 제갈량을 얻게 된다.

이처럼 유비가 제갈량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서서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서, 유비를 떠나다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면서 유표가 죽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표의 후계자인 차남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을 해버리는 바람에 유비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런데 조조의 추격군이 쫒아와 유비의 군대를 격파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는다.

그 와중에 서서의 모친이 조조군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에 서서는 어쩔 수 없이 유비에게 이별을 고하게 된다.

유비는 서서의 안타까운 마음을 잘 알기에 서서를 보내준다.

서서는 유비와 함께 왕패의 업을 도모하려 했지만 안타까운 현실이 유비를 떠나게 만든것이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위의 내용이지만 <위략>에 따르면 유표의 차남 유종이 조조에게 투항할 때 제갈량과 유비는 남쪽으로 갔으나 서서는 석도와 함께 북쪽으로 가서 조조에게 투항했다고 한다.


서서, 제갈량도 인정하는 인물

 

황초 연간(220~226년)에 서서의 관직은 우중랑장 어사중승에 이르렀고, 석도의 관직은 군수 전농교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퇴화 연간(227~232년)에 제갈량이 농서로 출병했을 때 서서와 석도의 벼슬이 이와 같음을 알고 직책이 낮다고 생각했는지 탄식했다.

하지만 서서의 관직인 어사중승은 관리에 대한 감찰업무를 총괄하는 어사대부의 부관으로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서서가 위나라에서 중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맞지 않다.

다만, 제갈량 입장에서 보면 제갈량은 서서의 능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서서의 직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제갈량은 촉나라에서 항상 아래 사람들을 훈계할 때 서서를 예시로 들며 서서의 처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제갈량은 서서의 능력을 크게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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