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22. 11:29ㆍ인물이야기/삼국지 인물 이야기
왕평은 글을 쓰지 못하고 아는 글자가 열 자를 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뜻을 다른 사람이 적어서 전달해야했지만 그 뜻과 도리가 어긋남이 없었다.
자신이 직접 읽을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을 시켜서 <사기>와 <한서>의 수 많은 본기와 열전을 읽게하고 들었다.
항상 법도를 지키고 말을 할 때는 농담도 하지 않아 근엄함을 지켰다.
그러나 직설적인 성격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불만을 샀던 인물.
마속이 왕평의 말만 들었더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촉나라 후기 촉나라의 실질적인 한중 수비 대장군인 왕평의 삶속으로 들어가보자.

왕평, 조조에게서 유비에게로 가다
왕평은 익주 파서군 탕거현 출신으로 어렸을 땐 외가인 하씨 가문에서 자라서 하평이라 불렸으나 나중에 자라서는 본래 성씨인 왕씨를 회복하여 왕평이라 불렸다.
건안 20년(215년),왕 평은 이 민족의 왕인 두호와 박호를 따라 조조에게 투항했고 가교위에 임명된 뒤 조조를 따라 한중정벌전에 나선다.
두호는 파서태수 박호는 파동태수로 임명되었고 열후에 봉해졌지만 유비 휘하에 있는 황권의 활약으로 모두 전사한다.
왕평은 한중정벌 전투중에 유비에게 항복했고, 유비는 왕평의 능력을 높이 샀는지 왕평이 항장인데도 불구하고 아문장, 비장군의 직책을 하사했다.
참고로, 왕평이 서황 때문에 행복하게 되는 것은 삼국지연의의 내용으로 지어낸 이야기다.
읍참마속과 왕평
건흥 6년(228년),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왕평은 마속의 참문이 되어 군의 선봉에 서게되었는데, 마속은 제갈량의 명을 받아 위나라의 지원군을 막기위해 가정에 주둔한다.
여기에서 마속은 자신의 운명을 뒤바꿀 결정을 하게된다.
마속은 적을 살피기 좋은 위치라는 이유로 병사들의 식수를 확보하지 않은 채 산으로 올라가 진용을 갖췄던 것이다.
이에 왕평은 군이 주둔한 형태가 병사들이 이동하기에도 번잡하여 적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없고, 산 아래에서 적이 포위를 하면 낭패라고 생각했기에 마속에게 지속적으로 군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마속은 이를 듣지 않았다.
마침내 위나라의 지원군을 이끌고 온 장합이 마속군의 식수를 끊고 마속군을 포위해 공격했다.
이로 인해 마속을 포함한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은 산산히 흩어졌다.
그러나 오직 왕평이 지휘하던 1천명의 병사들만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켰다.
장합은 그곳에 복병이 있을거라 의심하고 더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왕평은 그 틈을 타서 흩어진 병사들을 모두 규합하여 무사히 빠져나갔다.
이렇게 1차 북벌이 실패로 돌아간 뒤 제갈량은 마속에게 죄를 물어 마속의 목을 벤다.
제갈량이 아끼고 아끼던 자신의 장수의 목을 눈물을 머금고 벤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읍참마속이다.
그리고 마속의 휘하 장수들에게는 지휘권을 박탈하는 처벌도 내렸다.
하지만 왕평의 공적만은 특히 뛰어났으므로 그를 참군에 임명하여 오부를 통솔하게 했다.
거기에다 토구장군으로 승진했고 정후에 봉해지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1차 북벌에 참전했던 제갈량, 조운 등도 전투 후에 모두 강등되었으나 왕평 만은 고속 승진을 했다.
만약 왕평이 흩어진 촉나라 군대를 수습하지 않았다면 마속이 이끌었던 병사들은 위나라 군대의 공격에 그대로 전멸했을 가능성이 컸다.
제갈량 입장에서 왕평은 피와 같은 병사들을 큰 손실 없이 데리고 온 큰 은인인 것이다.
왕평,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다
건흥 9년(231년), 제갈량의 4차 북벌 때 왕평도 참전했는데,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하며 왕평에게는 따로 군을 주어 남쪽을 지키게 한다.
이에 사마의는 자신이 직접 제갈량을 공격하고 장합에게는 왕평을 공격하게 했으나 왕평은 마속과 달리 뛰어난 장수였기 때문에 그 장합도 왕평의 수비를 깨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앞서 가정 전투에서도 그랬지만, 장합은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잔뼈가 굵은 명장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왕평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건흥 12년(234년), 제갈량이 죽자 촉나라 군대는 철수를 해야하는 상황에 놓인다.
제갈량이 미리 내린 명에 따라 양의가 전군을 절수시키려 하자 평소 양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위연이 이를 거부하게 되어 촉나라 군대의 퇴각길은 난장판이 된다.
게다가 위연은 포야도 남쪽 입구를 점거한 다음 후퇴하는 양의의 군대를 공격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양의는 왕평을 보내 위연을 맡게했다.
왕평은 군을 이끌고 가서 위연의 군대와 대치했다.
여기서 왕평은 '공(제갈량)이 죽고 그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네놈들이 감히 이따위로 행동 하느냐' 라고 외치며 위연의 병사들을 꾸짖었다.
이 꾸짖음에 위연의 병사들은 위연에게 잘못이 있음을 알고 위연의 명을 따르지 않고 모두 흩어졌다.
그 결과 위연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양의의 명을 받은 마대에게 죽임을 당했다.
왕평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촉나라 군대는 내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왕평, 한중 방어의 실질적 책임자
왕평은 계속 승진하여 안한장군으로 임명되었고, 거기장군 오일(오의)을 보좌하며 한중태수도 겸임했다.
건흥 15년(237년), 오일이 사망하고 왕평은 오일을 대신하여 한중지역 사령관의 자리에 오른다.
연희 원년(238년), 대장군 장완이 익주 한중군 명양현에 주둔하면서 왕평은 전호군이 되었고, 장완의 대장군부의 일을 맡아서 처리했다.
연희 6년(243년), 장완이 부현으로 돌아가자 왕평은 전감군, 진북대장군으로 임명되어 한중지역을 통솔하게 된다.
왕평, 흥세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다
연희 7년(244년), 위나라 대장군 조상이 보기 10만여 명을 이끌고 한중 지역을 향해 침입해와 선봉대가 낙곡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때 한중을 지키는 촉나라의 병사들은 3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은 크게 놀라 성을 지키면서 지원군을 기다리자는 의견을 낸다.
그러나 왕평의 생각은 달랐다.
한중에서 부현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고 위나라 군대가 먼저 양평관을 차지한다면 더 큰 화를 불러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흥세산을 먼저 점거하고 위나라 군대가 더이상 진군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부현의 지원군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여러 장수들이 왕평의 계획에 의문을 표했지만 오직 호군 유민만이 왕평의 계획에 동의했다.
왕평은 유민과 함께 흥세지역을 점령하고 수많은 깃발을 꽂아 군사가 많아 보이도록 위장을 했다.
그리고 지세의 유리함을 이용해 위나라 군대를 막아냈다.
이후 왕평의 예상대로 부현에서 비의가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하자 위나라 군대는 퇴각했다.
왕평은 촉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눈부신 활약을 하며 촉나라를 지켜냈다.
그리고 연희 11년(248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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