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26. 11:37ㆍ인물이야기/삼국지 인물 이야기
삼국지 인물 중에서 주군을 배신하고 자신의 입신을 위해 구차하게 살아가는 인물들이 여럿 있다.
그러나 배신을 하지 않았는데도 주군을 배신한 것 보다 더 치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우금은 조조의 남자로 승승장구 한다.
그러나 관우에게 패하고 포로가 되면서 우금의 장수로서의 삶은 깡그리 무너진다.
거기에다 오나라 포로가 되었을 때의 우금의 생활은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더 나을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참했다.
우금의 삶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조조와 우금의 인연
우금은 연주태산군 거평현 출신으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포신이라는 인물이 병사들을 징집하자 그에게 합류하며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우금이 처음 주군으로 삼은 포신은 친조조 성향이었는데 그는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소를 지지할 때 조조를 지지한 인물이었다.
이후 우금은 포신을 따라 연주자사 유대 밑에서 황건적들과 싸웠는데 유대가 황건적들과의 전투에서 사망해 버렸기에 그의 후임으로 조조가 연주로 오게 된다. 그런데 유대에 이어 포 신까지 황건적과 싸우다 전사해버렸고 우금은 왕랑이라는 장군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왕랑은 우금을 높이 평가한 까닭에 대장군이 될 만한 자질을 가진 인물이라고 칭찬하며 조조에게 추천한다.
우금, 조조의 눈도장을 확실하게 받다
이에 조조는 우금을 불러 대화를 나눠본 뒤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는 군사마로 삼는다.
우금은 조조가 서주를 정벌할 때 투입되어 적의 진영을 함락시켜 삼진도위에 임명되었고 복양에서 여포의 군대와 접전을 치를 때도 별도의 군을 이끌어 여포의 군영 2곳을 격파하는 위용도 보여준다.
그리고 조조를 수행하며 장막, 진궁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킨 연주 일대를 돌며 반란을 모두 진압하였고 황건적의 잔당들을 토벌할 때도 참가하여 공을 세운다.
이렇게 장수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조조의 눈도장을 확실하게 받는다.
장수로서 불가동( 不可動 )의 절조를 보여준 우금
우금은 조조가 완의 장소를 토벌할 때 함께 했는데, 장소가 이내 항복했기에 큰 전투 없이 토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조의 난봉꾼 짓으로 장소가 반란을 일으키게 되어 조조가 목숨을 걸고 도주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조조를 구하기 위해 진영을 무너뜨리고 움직였지만 오직 우금만이 휘하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상황에 따라 싸우고 물러나기를 반복하며 진영을 무너뜨리지 않고 움직였다.
결국 적의 공격이 무뎌지게 되자 균형을 유지한 채 성공적으로 퇴각한다.
그렇게 상황이 종료되고 조조에게 합류하기 전 우금은 길에서 청주병들에게 약탈을 당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우금은 곧바로 청주병들을 찾아가 박살내고 죄를 묻는다.
본래 청주병들은 황건적이었는데 그들이 대거 행복했을 때 조조가 관용을 베풀어 이들 중 정예병을 뽑아 엄선하여 청주병이라 칭하고 군대로 활용했는데 이를 믿고 방자하게 약탈을 일삼은 것이었다.
그렇게 박살난 청주병 중 몇몇이 조조에게 달려가 우금에게 공격을 받았다고 일러바친다.
늦게 조조의 진영에 합류한 우금은 조조를 베알하기 전 보루를 세우며 진영을 정혼 한 후 조조를 만나러 간다.
조조는 우금의 행동과 발언을 듣고 기뻐하며 우금을 불가동(不可動, 위기에 처해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음)의 절조가 있다'며 극찬했다.
우금, 출정하는 곳마다 공을 세우다
우금은 그 이후로 조조의 원정에 함께하며 공을 세운다.
장소를 재공격할 때, 하비에서 여포를 사로잡을 때, 원소를 토벌할 때도 우금은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럴때마다 우금에 대한 조조의 믿음은 커져만 갔다.
특히 원소와의 전투가 임박했을 때는 자신이 직접 선봉에 서겠다고 자원한다.
이에 조조는 우금을 장하게 여겨 병사 2000명을 이끌게 했다.
우금은 연진에 주둔하여 원소군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고, 악진과 함께 원소의 별영을 공격하고 연진 남서쪽부터 황하를 따라 이동하며 적의 진영 30여 곳을 불사르고 원소군 장수 20여 명의 항복을 받아내고 수천 명의 적군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운다.
또한 관도에서 조조와 원소가 각각 진영을 세우고 토산을 만들어 대치를 한 상태에서 원소가 먼저 조조의 진영 안으로 활을 쏘아대자 많은 병사들이 죽고 다쳐 사기가 떨어졌는데, 우금이 직접 나서 토산을 맡아 지키며 힘을 다해 싸우고 기백을 떨쳤다.
우금, 옛 친구의 목을 베다
원소의 본거지였던 기주가 평정될 시기 창희라는 인물이 모반을 일으켜 우금은 창희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한다.
창희는 본래 유비가 서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조조에게 맞섰을 때 유비에게 호응했던 인물로 유비가 토벌되면서 항복했는데 또다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우금은 빠르게 진격하여 창희를 공격했고, 창희는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는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우금에게 항복을 한다.
이에 여러 제장들이 창희가 항복했기 때문에 포박한 뒤 조조에게 호송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우금은
제군들은 공의 상령을 모른단 말이오! 포위당한 후에 항복한 자는 사면하지 않는다고 했소.
무릇 법을 받들고 명을 이행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절도이오.
비록 창희가 나의 옛 벗이기는 하나 나 우금은 절도를 잃을 순 없소.
라고 대답한 뒤 직접 창희를 사형시키며 눈물을 흘렸다.
조조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탄식하면서 창희가 나에게 항복하지 않고 우금에게 항복을 했으니 이것이 그의 운명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한 뒤 법을 엄중하게 지킨 우금을 더욱더 중용했다고 한다.
명장에서 최악의 장수로 추락하다
건안 24년(219년).
조조는 조인을 형주로 파견하여 관우를 공격하게 했는데, 오히려 관우가 치고 올라와 조인은 역으로 포위되는 상황에 처한다.
이에 조조는 우금에게 최정예 7군을 주어 조인을 돕게 한다.
우금은 형주로 내려와 관우의 군대와 대치를 하지만 그해 가을에 큰 장마비가 내려 한수가 범람해 관우의 군대와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군 전체가 수몰되는 일이 일어난다.
이에 반해 관우는 이를 미리 대비해 큰 배를 타고 나와 우금의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우금은 관우에게 투항하게 된다.
그리고 오직 방덕만이 끝까지 싸우다 사로잡혀 처형을 당한다.
조조는 관우에게 맞설만한 인물을 고심 끝에 택한 것이 우금이었는데 한 번의 전투로 조조의 신뢰가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조조는 우금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오랫동안 슬퍼하고 탄식하며 말하길
내가 우금을 30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위난에 처하자
오히려 방덕보다 못하리라는 것을 어찌 짐작했겠는가!
이렇게 우금은 관우의 포로로 있다가 손권이 관우를 제거하자 손권의 포로가 되었고 이후 손권이 황제가 되어서야 포로의 상태에서 풀려나 위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위나라는 이미 조조가 죽고 조비가 황제가 된 상황이었는데 조비는 포로에서 풀려난 우금을 불러서 그와 만난다.
조비가 우금을 보니 수염과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모습이 초췌했는데 우금은 연신 눈물을 흘리며 조비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조비는고사를 들어 우금을 위로한 뒤 안원장군에 임명한다.
그러나 조비는 이내 본색을 드러냈는데 우금을 다시 오나라에 사자로 파견하면서 그전에 업에 있는 조조의 능묘에 가서 참배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런데 그곳에는 조비의 명령으로 관우가 전투에서 이기고 방덕이 분노하며 우금은 항복하는 그림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를 모르고 있던 우금은 조조의 능묘에 도착해서 그 그림을 보고 부끄럽고 분한 마음에 병을 얻어 죽는다.
우금의 오나라 포로생활과 치욕
우금이 오나라에 포로로 잡혀 있던 시절, 항장 담당 일진인 우번에게 걸려 여러 번 굴욕을 당했다.
한번은 손권이 우금과 외출을 하여 나란히 말을 타고 가던 도중 이를 본 우번이 우금 에게 '당신은 투항한 포로이거늘 어찌 감히 우리 주군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느냐'라고 꾸짖으며 채찍으로 얼굴을 때리려 했는데 손권이 이를 말렸다.
그 후 손권이 신하들을 모아 연회를 할 때, 우금을 참석시켰는데 우금이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리자 우번이 또 나서서 '당신은 거짓으로 사면을 구하려 하는구려'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런 굴욕을 느끼고도 살아서 위나라로 돌아갔으니 온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우금은 죽은 후 [여후]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과거 상나라 시법(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법)에서 '여'는 죄 없는 사람들 살육한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 우금은 죽어서도 이러한 시호를 얻어 능욕을 당했다.
게다가 배송지도 우금이 친구였던 창희를 죽인 일화를 이야기하며 방가하게 호살지심을 품어 중론을 저버려 놓고 이후 자신은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으니 죽은 후에 추악한 시호가 더해진 것은 당연하다고 평가했다.
'인물이야기 > 삼국지 인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지 인물 열전 - 조조, 조비, 조예 모두가 아낀 장수 조휴 (0) | 2024.03.28 |
---|---|
삼국지 인물 열전 - 싸움을 엄청 잘하는 오나라 장수 (0) | 2024.03.27 |
삼국지 인물 열전 - 배신의 달인 맹달 (1) | 2024.03.23 |
삼국지 인물 열전 - 조조가 눈물로 떠나 보낸 인물 (3) | 2024.03.22 |
유비, 공손찬, 조조의 장수 전예(田豫) (2) | 2024.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