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24)
-
십자군 전쟁 이후 예루살렘을 둘러싼 암투와 배신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과 네 개의 십자군 국가 십자군 전쟁에서 승리해 예루살렘을 점령한(1099년 6월 15일) 십자군. 한동안 약탈과 학살은 이어졌다.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과 지휘자들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1차 십자군의 승리 이후 4개의 십자군 국가가 건설된다. 4개의 지역을 전쟁에 참가한 지휘관들이 나누에 가지는 것이다. 에뎃사 백작령의 보두앵 백작,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공작, 트리폴리 백작령의 레몽 백작, 예루살렘 왕국의 고드프루아. 시간이 흘러 이 나라들을 그들의 후예들이 다스리게 되고 (고드프루아 1100년 사망,레몽 1105년 사망,탕크레드 1112년 사망) 예루살렘을 빼앗긴 이후 무슬림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 무슬림의 반격에 ..
2024.03.05 -
이슬람의 탄생과 유대인의 갈등
이슬람(팔레스타인인)과 유대민족(이스라엘)은 형제 이슬람 국가인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의 이스라엘이 전쟁중이다. 아니 팔레스타인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진행중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슬람(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이스라엘)은 한 형제였다. 이슬람과 유대인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한다. 기원전 2100년 경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 땅에 이사를 해서 살게된다. 아브라함의 아내의 이름은 '사라'. 그러나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어느날 아브라함은 사라의 여종인 '하갈'과 잠자리를 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 그 아들의 이름이 '이즈마엘'이다. 사라는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하갈의 아들이 이즈마엘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
2024.03.02 -
이란의 건국과 전성기, 로마와 클레오파트라
이란의 건국과 중흥, 그리고 페르시아 전쟁 이란 제국을 건설한 퀴로스 2세. 퀴로스는 관용정책으로 이란의 영토를 넓혔다. 이슬람의 관용정책 관련해서는 아래를 참고하면 된다. https://royed2000.tistory.com/15 십자군 전쟁의 원인은 바로 이것! 십자군 전쟁은 중세(1095년 부터 1291년) 유럽에서 벌어진 이슬람과 기독교 교회 간의 종교전쟁이라고 흔히들 얘기한다. 틀린말은 아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단순한 종교 전쟁이 아니다. 종교 royed2000.tistory.com 이렇게 퀴로스의 이란 제국이 성장을 거듭하자 이웃나라 뤼디아의 크로이소스왕은 불안했다. 그래서 그리스의 신에게 신탁을 구했는데 "이란을 침공하면 대제국을 멸망시킨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크로이소스왕은 이란과..
2024.02.28 -
예루살렘에서의 암투와 보에몽의 몰락
예루살렘의 파괴와 학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기 전, 마라트 안 누만의 학살을 통해 십자군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그 여세를 몰아서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있었다.(1099년 6월 15일) 약탈과 학살을 통해서만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슬픈 현실이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십자군들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고 무엇이 인간의 행동인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왜 참전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잃었다. 단지 약탈을 통해 재산을 모으려는 욕심과 기사로서의 명예를 얻으려는 잘 못된 생각에만 관심이 있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벌어진 살육에 일부 십자군 스스로도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3대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지중해 세계 전체가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성지..
2024.02.27 -
'롱기누스의 창'과 십자군의 기사회생
'롱기누스의 창'. 과연 이 창엔 어떤 사연이 있길래 십자군들이 성령이 깃들었고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었을까?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십자군의 학살. 그러나 카르부카가 안티오키아로 오면서 전세는 다시 달라진다. 성 안에 갖힌 십자군들은 굶주림과 공포속에서 대규모 탈영 사태가 일어나고 급기야 피에르까지 탈영을 하게 된다. 탈영을 시도하다 들켜서 안티오키아 대성당으로 도망친 피에르는 보에몽에 롱기누스의 창을 찾으려고 나왔다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 얘길 들은 보에몽은 무릎을 '탁' 쳤다. 보에몽의 머리를 번쩍하고 스쳐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역시 보에몽은 계략에는 빠른 두뇌를 가진 것 같다. 이슬람의 분열과 선동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십자군 피에르는 '롱기누스의 성창'이라고 우기는 유물을 들고 십자군 지휘관들에게 달..
2024.02.25 -
십자군 전쟁 안티오키아 전투(1097년 10월~1098년 6월)
보에몽의 꿍꿍이 1097년 10월. 니케아 함락과 도륄라이온 협곡에서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십자군은 곧바로 안티오키아까지 진격했다. 십자군에 대한 소문을 들은 이곳 사람들은 십자군에게 대한 반감이 아주 컸다. 그도 그럴것이 지나는 곳마다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으니 좋을리가 없었다. 안티오키아 사람들은 십자군에게 먹을 것을 주지도 않았으며 거래 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거기에다 십자군 내부의 분열로 어려운 기간을 보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레몽과 보에몽간의 분열이었다. 레몽 백작은 즉시 공격하여 점령하자고 주장했지만 보에몽은 반대했다. 병사들이 지쳐서 요새를 점령하려면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원정군 입장에서는 속전속결로 이곳을 점령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어찌된 일인지 보에몽은 결..
202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