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각오하며 수십 배의 적군을 물리친 삼국지 장군들

2024. 6. 18. 10:48인물이야기/삼국지 인물 이야기

삼국지 당시의 전쟁은 군사와 군량이 많으면 무조건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특별한 대량 살상 무기가 없는 데다가 개인이 가지고 있는 무기 또한 별 다를게 없기 때문이다.

싸움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지휘관의 지략과 개인 병사들의 사기와 무술 실력이 전부이다.

그나마도 백병전이 벌어지게 되면 지략도 지휘도 필요없이 각자 도생을 하며 적과 맞붙어 싸워야 한다.

그래서 세력을 불리고 군량 확보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상대는 수가 많고 자신의 병사는 적을 때는 무조건 수비를 해야한다.

수많은 병법서에 공성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수정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하나의 방법이 정답은 아니지만 지휘관의 지략과 병사들의 패기로 수성에 성공한 경우를 알아보자.

 

삼국지에서 상대의 병력이 수십 배에 달하는데도 수성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

촉나라 유비의 장수 곽준과, 위나라의 학소, 그리고 3천의 병사로 20만 오나라 군대를 막아낸 장특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곽준. 출처 : 나무위키

수백 명으로 1만의 군대를 격파한 곽준

 

곽준은 형주남군 지강현 출신으로 원래 유표군 소속이었으나 유표가 죽은 뒤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유비의 밑으로 들어가 중랑장이 된다.

유비의 익주 침공때 곽준은 유비의 명에 따라 장로군과 유장군을 모두 막아야 하는 요충지인 가맹관의 수비를 맡게 된다.

유비와 유장이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장로가 꾀를 부려 장수 양백에게 군대를 주어 가맹관에 파견했고 양백은 곽준에게 유장군의 공격을 막는데 도움을 줄 테니 성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장로의 얄팍한 꾀를 간파하고 있던 곽준은 자신의 머리는 얻을 수 있어도 성은 얻을 수 없다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양백은 죽을 각오로 나오는 곽준의 기세에 눌렸는지 즉시 군사들을 물린다.

 

이후 유장의 장수인 상존 등이 만여 명의 군세를 이끌고 진격해 와서 곽준을 포위한 뒤 공격을 퍼붓는다.

당시 곽준이 가진 병사는 겨우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거의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적의 공격을 막아낸다.

수적 열세 속에서 적의 대군을 막아낸 것도 기적적인 일이지만 곽준이 더 돋보이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곽준은 공성 기간이 오래되어 적군이 지치고 나태해지자 정예 병력을 선발하여 적에게 역공을 가해 적의 사령관인 상존의 목을 베고 적의 군대를 폐퇴시켰다.

유비는 곽준의 공로를 크게 칭찬하며 그를 우대하였으나 애석하게도 3년 후에 4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유비는 매우 슬퍼하며 제갈량에게 조서를 내리고 직접 신하들을 이끌고 조제에 참석하고 그 묘위에 머물며 잤다고 한다.

 

학소. 출처 : 나무위키

제갈량의 2차 북벌을 막아낸 학소


학소는 병주 태원군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군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잡호장군에 임명된 뒤 하서 지역을 지키는 임무를 10여 년 가까이 맡았는데 이민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복종했다고 한다.


태화 원년(227년)에는 서평군에서 도적들이 봉기하자 출군하여 도적의 군대를 격파하고 적장인 국연을 참수한다.

이후 조진의 명을 받들어 진창으로 파견되어 제갈량의 침입을 대비하게 된다.

태화 2년(228년) 12월 제갈량의 2차 북벌이 시작되었고 조진의 예상대로 제갈량은 진창지역으로 진격해왔다.

당시 제갈량의 병력은 수만 명이었고 진창을 수비하는 학소의 병력은 천여 명에 불과했다.

제갈량은 공격을 시작하기 전 학소와 같은 고향 사람인 근상을 보내서 학소의 항복을 종용한다.

그러나 학소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의지를 보이며 근상을 돌려보낸다.

제갈량은 한 번 더 근상을 보내지만 이마저도 실패한다.

이때 학소가 근상에게 한 말이 예술이다.

"나는 자네를 알아도 내 화살은 자네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을 알아두라"

그만큼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설득에 실패하자 제갈량은 파상공세를 펼친다.

하지만 학소는 제갈량의 공격을 완벽하게 차단해낸다.

운제와 충차가 성으로 다가오자 운제에 불화살을 운제 위에 있던 촉나라 병사들을 모두 불에 타 죽게했다.

그리고 밧줄로 큰 돌을 묶어 충차에 떨어뜨려 충차도 박살내고 만다.

그러자 제갈량은 백척 높이의 정란을 만들어 성 안으로 활을 쏘게 하고 흙으로 참호를 메꾸고 군사들을 기어오르게 한다.

학소는 성 안에 이중으로 담장을 쌓아 이 또한 막아낸다.

이번에는 제갈량이 땅굴을 파서 성 안으로 진격하려 하자 학소는 성 안에 가로로 땅을 파버린다.

이와 같이 제갈량은 밤낮 없이  20일간 지속적인 공격을 펼쳤으나 학소는 끝까지 막아냈고 결국 위나라의 장합, 왕쌍등이 구원군을 이끌고 도착하게 되자 제갈량은 퇴각한다.

학소는 제갈량의 군대를 막아낸 공으로 열후에 봉해졌고 조예는 매우 기뻐하며 학소를 크게 중용했다.

 

이후 학소가 병에 걸려 임종이 다가오자 자신의 아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자신은 장수로 살면서 여러 번 남의 무덤을 파헤쳐 그 도구들을 전투에 사용했기에 장례를 치르는 것이 죽은 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이 죽으면 평소에 입던 옷으로 염을 하라.
그리고 사람이 살아있을 때야 처소가 있지 죽은 뒤에도 있겠느냐 내 묘는 동서남북 어디든 네가 마음대로 정하라는 유언이었다.

 

장특. 출처 : 나무위키

계책으로 20만 대군을 막아낸 장특

 

가평 5년(253년) 5월 오나라의 제갈각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신성을 포위한다.

장특은 당시 3천명의 병사와 함께 합비신성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90여일 동안 오나라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지속적인 공격과 질병이 발생하는 바람에 반이 넘는 병력을 잃게 된다.

게다가 제갈각이 토산을 쌓아 공격해왔고 곧 성이 함락되어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장특은 계책을 낸다.

제갈각에게 사신을 보내 아래와 같이 말한다.

 

자신은 싸울 마음이 없다.
그러나 위나라 법에는 적의 공격을 받은 뒤 100일이 넘어 구원병이 오지 않으면 항복을 하여도 그 집안 사람들을 연좌시켜 처형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지금 90여일이 지났으니 조금만 말미를 달라. 그리고 끝까지 항전하려는 인물들의 명단까지 보내겠다.

 

제갈각은 장특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공격을 멈춘다.

이에 장특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집을 부숴서 구한 목재로 밤을 세며 목책을 만들어서 성이 뚫린 부분을 두겹으로 메운다.

이렇게 적의 공격을 대비한 장특은 다음날 오나라 군대에게 "나는 싸우다가 죽을 것이다"라고 외쳤고 속임수였다는 것을 알게 된 오나라 군대는 분노하며 다시 공격했으나 합비신성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리고 각종 질병과 피로에 노출된 오나라 군대는 결국 퇴각하게 된다.
장특은 이 공으로 열후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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