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삼국지 인물 열전 - 도겸

2024. 5. 24. 18:54인물이야기/삼국지 인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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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에서의 도겸은 인망이 자자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조조군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전해와 유비의 도움이 있었지만 조조군에 맞서 서주를 지켜낸 인물이다.

유비의 도움을 받는 부분과 세상을 떠나면서 서주를 유비에게 맡기는 장면은 정사와 같다.

이렇게 정사에서의 모습과 다르게 묘사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유비를 주인공으로 띄워야 하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 또한 좋은 사람으로 묘사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겸의 일화들을 하나씩 보면 도겸도 문무를 겸비한 장수임이 보인다.

그의 삶 속으로 함께 가보자.

 

도겸. 출처 : 나무위키

도겸, 떡잎부터 다른 용모


도겸은 양주 단양군 단양현 출신으로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자라면서 사고를 많이 쳤는지 마을에선 도겸을 막돼먹은 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4살이 되어서는 헝겊으로 깃발을 만들고 죽마를 타고 놀았는데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모두 도겸을 따랐다고 한다.

창오태수였던 감공이라는 사람이 길을 가다가 도겸과 마주쳤는데 도겸의 용모가 비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도겸을 불러 이야기를 나눈 뒤에 크게 만족하며 도겸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감공의 부인이 분노하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감공은 도겸은 남과 비교할 수 없는 외향을 가졌으니 성장한다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라면서 약속대로 자신의 딸과 도겸을 혼인시킨다.

 

도겸, 올곧고 강한 자존심의 소유자

 

도겸이 서현의 현령이었을 당시 여강태수는 장반이라는 사람이었다.

장반은 같은 고향 출신의 선배이면서 도겸의 아버지와 친구였다고 한다.

하지만 도겸은 장반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치욕스러워했다.

어느 날 장반이 도겸에게 춤을 춰보라고 부탁했다.

도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 끈질긴 강요 끝에 어쩔 수 없이 춤을 추게 되었는다.

춤을 추는 도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억지로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를 본 장반이 거기서 한 바퀴 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훈수를 뒀다.

그러자 도겸은 여기서 회전을 한다면 다른 분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면서 장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일화를 보면 자존심이 강하고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성격인 것 같다.

 

뛰어난 행정 능력 VS 인사의 난맥상

 

도겸은 청년이 되면서 부터 학문을 좋아하게 되었고 유생이되었다.

행정 능력이 뛰어나 관직을 얻은 이후에 네 차례에 걸쳐 승진하여 유주자사의 직책까지 오른다.

그리고 도겸은 학식만 뛰어났던게 아니었다.

무예도 뛰어나 서량에서 변장과 한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장온의 참군이 되어 토벌전에 참가했다.

참고로 당시에 무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손견도 장온의 참군이었다.

이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서주자사로 임명되어 서주지역으로 파견되어 나간다.

도겸은 서주지역에 있는 황건적들을 모두 격퇴하고 서주지역을 안정시킨다.

서주지역은 원래 부유하고 식량도 풍부한 지역었는데 황건적이 물러나니 백성들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주변지역에까지 소문이 퍼져 이각과 곽사의 행포를 피해 도망온 유민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받아들인다.

도겸은 서주자사가 된 이후 왕랑, 진등, 조욱, 미축 등 여러 인재들을 등용시키며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한껏 발휘한다.

서주지역에 기근이 들었을 땐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진등을 전농교위로 삼아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 데에 도움을 주도록 했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을 보여준 것과 달리 객관적 기준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선 조굉 같은 참언이나 일삼는 소인배들을 신임하여 주변에 두었고, 상벌을 내리거나 행정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기준을 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다.

도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곁에서 충언을 하는 조욱을 광릉태수로 추천하여 내보내 도겸의 주변에는 아첨꾼들만 남았다.

거기에다 하비에서 궐선이라는 자가 자신을 천자라 칭하며 반역을 일으켰는데 이와 연합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물론 연합한 이후 그를 죽이고 그의 군세를 흡수하였기에 궐선의 군대를 얻기 위해 거짓으로 연합을 맺었다고 생각할 여지도 있다.

어쨌든 도겸의 잘못된 행보에 서주지역의 많은 백성들은 불만을 가졌고, 서주는 차츰 혼란스러워졌다.

 

도겸의 인사중 최악의 인사가 바로 착융을 등용한 것이다.

자신과 같은 단양군 출신의 착융이 수백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왔기에 도겸은 기뻐하며 그에게 광릉, 하비 ,팽성 세 곳의 식량수송을 감독하게 했다.

하지만 착융은 세 곳의 물자를 끊고 거대한 불교 사원을 건립한다.

본전은 3천명이 수용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자랑했다고 하며 황금으로 칠한 불상을 만들어 비단옷을 입혔고 사원 위로는 수많은 금괴가 쌓여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음식을 차려 불교를 포교하기 시작했는데 음식을 먹으러 오거나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1만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착융은 해야할 일은 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했다.

 

도겸, 조조의 원한을 사다

 

원소와 원술이 대립하는 상황이 생긴다.

조조와 유표는 원소와 함께 했고, 공손찬과 도겸은 원술과 함께 했다.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전투를 벌였으나 조조와 원소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후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이 동탁의 난을 피해 낭야로 피난을 했다가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숭이 죽게 된 원인에 대해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먼저 도겸이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을 노리고 직접 군대를 파견해 죽였다는 주장이 있다.

<위서 무제기>에선 도겸에게 해를 입었다고 간략하게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주석으로 달린 <세설신어>라는 소설엔 이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소설에서는 도겸이 조숭을 죽였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해서 쓴것 같다.)

조조가 태산태수인 응소에게 자신의 가족들을 연주로 보내라 명했다.

그러나 응소의 군사들이 당도하기 전에 도겸이 은밀히 수 천명의 병사를 보냈다.

조조의 가족들은 도겸의 병사들이 응소의 병사들이라 착각하고 응접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도겸의 군사들은 조조의 동생 조덕을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을 포함한 조조의 가족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후한서 조등열전>에는 조숭이 서주자사 도겸에게 살해당했다고 나와있고 <후한서 도겸열전>에 주석으로 달린 응소전에는 도겸은 조숭의 자식인 조조가 자주 공격해오는 것에 앙심을 품고 경기병으로 하여금 조숭을 추적하게 하여 죽여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도겸이 조조의 가족을 몰살했다는 주장과 반대로  도겸은 조숭의 죽음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위서 무제기>에 주석으로 달린 위요의 오서에는 도겸은 조숭의 호의를 돕기 위해 도위였던 장개와 병사 200명을 보냈는데 장개는 조숭의 재물이 많음을 알고는 재물을 빼앗고 조숭을 죽인 뒤 회남지역으로 달아났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후한서 도겸열전>에는 도겸의 별장과 사졸들이 조숭의 재물에 눈이 뒤집혀 그를 습격하여 죽였다고 나와 있다.

이렇게 상반된 주장이 존재하지만 어찌됐든 조숭의 죽음에 대해 도겸이 일정 부분 아니면 대부분 연관되어 있는 것은 사실인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가족들이 도겸에 의해 화를 당했으니 조조는 도겸에 대한 원한이 깊어질 수 밖에 없었다.

 

도겸, 조조의 끈질긴 침략을 버티다

 

조숭의 죽음을 계기로 조조는 초평 4년(193년) 서주지역을 침략한다.

도겸은 맞서지만 조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도겸은 연전연패하며 10여개의 성을 빼앗긴다.

그리고 팽성 전투에서도 크게 패하며 담현지역으로 후퇴해 농성에 들어간다.

그리고 공손찬의 수하였던 전해에게 사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고 전해는 도겸을 도울 준비를 한다.

한편 조조는 전해와 유비의 지원군 소식이 들려오고 식량까지 부족하게 되자 어쩔수 없이 퇴각을 하게 된다.

조조는 퇴각하면서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렀다.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닭이나 개조차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살육을 일삼았고 죽은 자만 10만 명이 넘고 산처럼 쌓인 시체들로 인해 사수의 물이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5개 현의 성곽에는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흥평 원년(194년)에 조조는 서주지역으로 다시 출병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여러 현을 함락시키면서 서주민들을 학살하며 전진했다.

그리고 조표와 유비의 군대를 차례로 깨부순다.

이에 도겸은 두려운 나머지 단양지역으로 도주한다.

풍전등화의 순간에 도겸이 한 숨 돌리는 반전의 소식이 들려온다.

진궁과 장막이 조조를 배신하고 여포를 끌어들여 조조의 거점을 노리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후방이 위험해진 조조는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퇴각하게 된다.

도겸은 조조의 위협에서 벗어났지만 병에 걸려 임종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죽기 전에 미축에게 유비가 아니면 서주지역을 안정시킬 수 없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도겸의 나이 63세였다.

 

참고로 연의에서는 도겸에게 2명의 아들이 있다고 나온다.

연의에서는 도겸 본인을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이 유비에게 서주를 다스려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도겸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실제로 도겸에게는 도상(陶商)과 도응(陶應) 아들 두 명이 있었는데 모두 출사하지 않았다.

대게는 자신의 아들에게 정권을 넘기지만 도겸은 서주를 유비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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