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차반의 인성이지만 싸움을 너무 잘하는 감녕

2024. 4. 1. 22:08인물이야기/삼국지 인물 이야기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 중 인성이 완전 개차반인 인물이 많다.

계급사회임을 감안하더라도 기본적인 인성이 있고 그만큼 교육도 있었지만 인성이라고 찾아보기 힘든 인물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시대가 인성보다는 권력자에 대한 충성과 싸움 실력을 더 크게 보는 시대에 살아서 출세를 할 수 있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싸움을 잘하는 부하를 둔다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단순 무식한 부하가 충성심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오나라의 반장과 함께 싸움은 잘하지만 인성이 비루하고 지저분한 삶을 살고 간 인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감녕이다.

감녕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감녕. 출처 : 나무위키


감녕, 노략질과 살생을 밥먹듯이 하다

 

감녕이 주로 형주지역에서 활동하기에 형주 출신 인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감녕의 고향은 익주 파군 임강현으로 그는 파촉지역 출신이다.

그러나 <오서>에 따르면 감녕은 본래 형주 남양군 사람인데 그의 선조가 파군지역의 빈객으로 가게 되면서 익주지역으로 이동했다고도 한다.

감녕은 어렸을 때부터 기가 있었고 사나이다운 기질을 가진 사람을 좋아했다고 하며 이른 나이에 촉승이라는 관직을 얻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얼마 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후 감녕은 무뢰한들을 불러모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리고 생명을 가벼이 여겨 사람을 함부로 죽이기도 했고 성의 관원들조차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하들을 풀어서 겁박하거나 재물을 빼앗는 등의 횡포를 일삼는다.

그렇게 강탈한 재물이 어찌나 많았던지 <오서>의 기록을 보면 감녕이 출입을 할 때 뭍에서는 수레와 말을 펼쳐놓았고 물에서는 빠른 배를 연이어놓았으며 그를 시종하는 자들은 무늬가 있는 비단옷을 입어서 마치 그 광경이 길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배로 이동을 하다 멈추어설 때면 항상 비단으로 배를 메었다가 떠날 때면 이를 잘라버리는 사치스러움도 보인다.

노략질을 통해서 얻은 재물이니 그 가치를 알리가 없다.

언제든 또 노략질로 재물을 모으면 되니까.


감녕, 반란의 실패와 유표와의 인연

 

감녕은 활과 화살을 지니고 깃털을 등에 꽂고 방울을 허리에 찬 채로 다녔는데 백성들은 방울 소리만 들어도 즉시 감녕인 것을 알았다고 하니 백성들에게 감녕의 방울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영웅기>에 따르면 그렇게 망나니 짓을 20년이나 하던 감녕은 유원이 죽고 그의 아들 유장이 뒤를 이었을 때 신미, 누발, 감녕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평주의 유표에게 도망을 쳤다.

<영웅기>의 기록이 맞다면 감녕의 세력은 동네 양아치 수준이 아닌 군벌 수준이었다는 것이고 유장에게 반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유표에게 도망친 것이다.


찬밥신세의 감녕

 

<오서>에 따르면 감녕은 유표를 찾아갔지만 유표도 감녕을 딱히 임용하지 않았고 감녕도 유표가 유생인데다 군사를 다루는 일이 어설프다고 여겨 유표를 떠나 오나라로 들어가고자 한다.

하지만 하구에 버티고 있는 황조 때문에 자신이 거느린 병사들과 함께 그곳을 지나갈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황조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유표와 마찬가지로 황조도 감녕을 등용하지 않고 3년이나 방치한다.

황조가 손권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을 때 감녕이 뛰어난 궁술 실력을 발휘하여 적장인 능조를 죽여 황조를 위험해서 구출해내기도 했다.

그래도 감녕에 대한 황조의 대우는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감녕의 빈객들을 꼬셔서 감녕의 세력을 약화시키기까지 한다.


감녕, 손권을 만나 빛을 발하다

 

소비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황조의 측근이었다.

소비는 황조에게 수차례 감녕을 추천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소비는 감녕을 술자리에 초대한 뒤 '내가 널 추천해도 소용이 없으니 널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떠나라'고 조언한다.
이에 감녕은 뜻이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였고 소비는 감령이 떠날 수 있도록 계책을 내어준다.

소비의 도움으로 감녕은 자신을 따르는 수백 명과 함께 오나라 손권에게 귀순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능력을 알아본 주유와 여몽이 감녕을 천거하자 손권은 감녕을 등용한 뒤 옛 신하와 똑같은 대우를 해줄 정도로 특별히 여긴다.

감녕은 손권의 총애에 보답하기 위해 손권에게 형주지역을 차지하는 게 중요하고 그러려면 먼저 황조를 공격해야 한다는 조언을 한다.

감녕의 계책을 들은 손권은 그를 칭찬했는데 그자리에 같이 있던 장소가 감녕을 비난하며 군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한다.

하지만 손권은 감녕을 믿고 군대를 출진시켜 황조를 공격했고 황조를 격파하는 데 성공하여 그의 사졸들을 모두 사로잡는 전공을 세운다.

<오서>에 따르면 손권이 황조를 격파했을 때 상자 두 개를 만들어 황조와 소비의 머리를 넣으려고 했기에 소비는 황급히 감녕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했고 감녕은 소비에게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어찌 자네를 잊겠는가'라고 대답한다.

이후 손권이 황조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부장들을 격려하기 위해 주연을 베푼 자리에서 감녕은 좌석에서 내려와 손권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소비의 도움 덕택에 주군의 밑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며 소비가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요청한다.

손권은 감녕의 발언에 감동한 뒤 만약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아 도망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고 이에 감녕은 소비는 그럴 사람이 절대 아니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하겠다고 말하자 손권은 소비를 사면시켜준다.


오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용장

 

황조를 잡은 공으로 감녕은 병권을 받아 당구에 주둔하였고 이후 적벽대전 남군전투에도 참가한다.

감녕은 주유에게 조인을 견제하기 위해선 이릉을 점거해야 한다고 말하며 병사 1천 명을 이끌고 이릉성을 점거했는데 이것을 알아챈 조인이 병사 5 ~ 6천명을 보내 감령을 포위한다.

감녕은 며칠 동안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고 위나라의 조인 군대는 높은 누각을 세워 성 안으로 비 내리듯이 화살을 쏘아댔지만 여유롭게 조인의 공격을 막아냈다.

곧이어 주유와 여몽이 지원군을 이끌고 와서 감녕은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감녕은 익양대치 때도 뛰어난 용맹과 기개로 관우를 견제한다.

당시 관우는 3만 명의 병사 중 직접 정예 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밤을 틈다 냇물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당시 감녕의 휘하에는 300명이 있었는데 그는 노숙에게 500명만 더 주면 자기가 직접 관우를 상대하겠다고 하면서 '관우는 제가 기침하며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물을 건넌다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노숙이 1천 명을 선발하여 병력을 증원해주니 이를 이끌고 출전하였고 실제로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강을 건너갈 계획을 철회한다.
그리고 환현을 공격할 때도 최고의 군공을 세운 여몽의 뒤를 잇는 공을 세웠고 합비 전투에서도 눈부신 전공을 세워 손권이 특별히 칭찬하기도 한다.

 

감녕의 활약 중 가장 대단했던 건 유수구 전투에서의 일이었는데 손권이 앞에 있는 적의 진영을 쳐부수라는 명을 내리자 감녕은 특별히 하사받은 쌀과 술, 안주들을 자신의 수하 백여 명에게 든든하게 먹이고는 그들과 함께 늦은 밤 조조의 진영으로 급습을 감행한다.

<강표전>에 따르면 조조가 이끌고 온 보기 40만 명은 감령이 이끄는 100명밖에 되지 않은 병력에게 급습을 당해 혼비백산했다고 하며 감녕은 적 수십 명을 참수하는 전공을 올린 뒤 진영으로 돌아와 북과 나팔을 불며 승전보를 울렸다고 한다.

이후 감령이 손권을 알현하자 손권은 매우 기뻐하며 비단 1천필과 칼 1백자루를 하사한다.

그러면서 조조에겐 장료가 있지만 나에겐 감령이 있으니 족히 서로 상대해볼만 하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개차반의 인성을 가진 감녕


한 번은 감녕의 주방에서 일하던 어린아이가 잘못을 저질러 여몽에게 달려가 살려달라고 구원을 청한다.

여몽은 감녕의 그 성격에 당연히 아이를 죽일 거라 생각하여 감녕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보호한다.

일은 그렇게 마무리될 것으로 보였으나 감녕은 곧 직접 예물을 들고 여몽의 집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여몽의 모친에게 극진히 대접한 뒤 아이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하고 자신의 주방에서 일하던 아이를 데려간다.

 

그런데 감녕은 아이를 데리고 오자마자 뽕나무에 묶어놓고 직접 활을 쏴 죽인다.

이 소식을 들은 여몽은 격노하여 병사들을 모아서 감녕을 공격하려 하지만 여몽의 모친이 맨발로 달려와' 황상께서 너를 육신처럼 대우하고 국가의 대사를 너에게 위탁하였는데 어떻게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감녕을 죽이려 하느냐. 그게 신하로서의 도리냐' 라고 말하면 여몽을 길을 가로 막는다.

평소에 지극한 효자였던 여몽은 모친의 말을 듣고 감녕을 용서하기로 하고는 직접 감녕을 찾아가 웃으며 '어머니께서 그대를 식사에 초대하셨으니 빨리 올라오시오'라고 말했고, 감녕은 눈물을 흘리며 '그대와 약속을 져버려서 미안하오'라고 대답한다.

이후 감녕은 여몽과 함께 돌아와 여몽의 모친과 함께 온종일 즐겁게 지냈다는 일화가 있다.

 

아이를 뽕나무에 묶어서 활을 쏴서 죽인것이 사사로운 것인가?

여몽과의 약속을 어긴 것도 사사로운 것인가?

이런 개 망나니도 시절을 잘 만나면 재물이 넘치고 출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굽히기 싫어하는 성격의 감녕

 

어떻게 보면 감녕은 황조 휘화에 있다가 손권에게 왔기에 항장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보통 항장 출신들은 책을 잡히지 않기 위해 몸가짐을 바르게 하거나 항복한 나라의 중신들과 불화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지만 감령은 달랐다.

앞서 감녕이 황조를 공격하자고 했을 때 장소가 그를 비난하며 반대하자 감녕은 장소에게 '나라에서는 그대에게 소화의 임무를 맡겼는데 그대는 지키기만 하면서 혼란을 걱정하고 있으니 어찌 고인을 배우기 바라시오' 라고 말하며 비아냥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감녕은 손권의 사촌동생인 손교와의 일화에서도 포스를 가감없이 드러내는데 보통 자신이 섬기는 군주의 친족과 불화가 발생하면 누가 잘못했든 간에 신하의 입장에서는 먼저 굽히는 게 당연할진데 감령은 '신하와 공자는 하나의 학열이오. 비록 공자가 정로장군이지만 어찌하여 함부로 행동하고 사람을 모욕할 수 있겠소. 나는 훌륭하고 뛰어난 군주를 만났으니 마땅히 공적을 세우고 목숨을 바쳐 군주에게 보답해야 할 뿐이지 관례에 따라 몸을 굽힐 수는 없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와 같은 일화들에서 보여지는 감령의 불같은 성격은 환경에 따라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두려움 없이 적과 싸우는 용맹함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난세가 아니면 버림 받을 인물 감녕

 

감녕은 이릉대전이 일어나기 전 노환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호탕한 성격을 가진 감녕.

유능한 인물들을 후하게 대우하며 병사들을 잘 훈련시켰기에 감녕을 따르는 병사들은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사납고 살생을 좋아했으며, 재물을 경시했다.

 

이처럼 감령은 자기 사람이나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좋은 인물이지만 살생을 좋아하는 성격을 봤을 때 적이나 그의 눈 밖에 난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없이 악마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위서> 여몽전에 따르면 감녕은 난폭하고 살생을 좋아해 이미 여몽의 눈밖에 났고, 때로는 손권의 명을 어기기도 해서 손권은 분노하며 감녕을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여몽은 그때마다 손권에게 감녕 같은 장수는 얻기 어려우니 천하가 평정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봐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감녕의 성정은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단점에 불과했을 것이나 난세였기 때문에 단점이 장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권력자들도 사람 보는 눈이 있다.

아무리 싸움을 잘 하더라도 성정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지 않으면 높은 벼슬을 내리기 쉽지 않다.

백성들이 힘들면 금새 무너질 수 있는 구조 때문이다.

싸움 잘하는 감녕을 재물을 주고 전투에 이용한 것이 손권으로서는 잘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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