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십자군 전쟁의 실패 원인

2024. 3. 15. 11:48역사/유럽역사 이야기

1187년 예루살렘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서유럽 사람들은 충격에 빠진다.

곧바로 3차 십자군 원정대를 소집한다.

3차 십자군 원정군을 이끌려는 리처드 1세는 아버지와의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대관식을 통해

정식적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재산을 팔아서 3차 십자군 원정에 나선다.

 

대관식을 치르고 출정하기 전까지 자신의 나라 잉글랜드에서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잔인한 모습을 보였다.

평소 이민자들을 학대 하던 나라에서도 대관식날 만큼은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조심하건만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아크레성으로 모여든 3차 십자군들.

그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있을까?

 

대관식과 유대인 학살에 대한 내용은 아래의 글을 참고하세요.

 

사자왕 리처드 1세, 전쟁을 위한 학살이 시작된다

 

사자왕 리처드 1세, 전쟁을 위한 학살이 시작된다

리처드 1세는 아버지를 이기고 왕이 된 남자다. 어머니의 든든한 후원과 프랑스의 필리프 왕의 지원으로 형제들을 이기고 아버지인 헨리 2세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리처

royed2000.tistory.com

 

 

3차 십자군의 이동 경로. 출처 :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리처드 1세의 키프로스섬 도착과 정략결혼

 

예루살렘을 장악한 살라딘이 주변 국가들을 하나씩 점령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닐 때 리처드의 잉글랜드는 한창 내전 중이었다. 

그리고 내전에서 승리한 리처드의 원정대는 배를 타고 키프로스섬에 도착한다.

키프로스섬에 도착한 그에게 뤼지냥의 기왕이 찾아 온다.

 

키프로스 섬에 도착한 리처드는 전쟁을 치르기 전 엘레오노르가 구상한 정략결혼식을 올린다.

상대는 나바라 왕국의 베렝가리아 공주였다.

아키텐의 바로 아래에 위치한 나바라 왕국과 손을 잡으면 아키텐 지역은 안심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리처드는 정혼자인 아델공주(필리프 2세의 누이)를 버리고 엘레오노르가 시키는대로 베렝가리아 공주와 결혼을 하게된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좋아할 리 없었다.

결혼한 다음날 리처드 1세는 키프로스의 지배자 이사키오스를 잡아서 감금하고 지중해 주변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노략질을 즐기면서 천천히 나아갔다. 

 

아키텐 왕국 주변 지형. 출처 :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키프로스 왕국의 기원

키프로스는 동로마제국의 신하였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1155~1195년)가 동로마제국의 황제를 속이고 지배하고 있었다.
1191년 리처드 1세와 결혼을 하기 위해 나바르 왕국의 베렝가리아 공주가 탄 배가 난파되어 키프로스섬에 표류하게 되었는데 이사키오스는 승무원들을 억류한 일이 일어난다.
이 소식을 들은 리처드 1세는 그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결혼식 다음날 군대를 이끌고 가서 섬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이 섬을 점령했다.
그리고 뤼지냥의 기에게 다스리도록 했다.
이것이 키프로스 왕국의 기원이다.

아크레 전투의 전초전인 티루스 공방전

 

한편, 1187년 9월 예루살렘을 해방시킨 살라딘.

살라딘은 전쟁에서 붙잡힌 포로들에게 관대하게 대해줬다.

다시는 공격해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들을 풀어주었다.

포로들은 풀려나자 살라딘과의 약속을 헌 신짝 버리듯 던져 버린다.

그리고 코라도가 있는 티루스로 모여들었다.

 

1187년 11월. 살라딘은 주변국들을 하나씩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한다.

가장 중요한 전투가 바로 티루스 공방전이다.

살라딘은 티루스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하지만 코라도와 풀려난 기사들은 끝까지 저항을 한다.

살라딘은 잡혀 온 포로들 중에 티루스의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코라도에게 아버지를 보내 회유를 시도하지만 코라도가 아버지를 향해 화살을 날리면서 실패한다.

 

코라도의 강한 의지를 확인한 살라딘은 코라도의 아버지를 풀어주고 티루스 주변국을 먼저 점령하기 위해서 퇴각한다.

이후로도 풀려난 포로들이 티루스 성으로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그 속에 뤼지냥의 기왕과 그가 이끌었던 포로들도 있었다.

티루스로 간 기왕은 자신이 예루살렘의 왕으로서 티루스의 지휘권을 요구했다,

코라도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성문을 걸어 잠그고 기왕을 성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아크레 전투의 개시

 

뤼지냥의 기왕은 자존심을 크게 다쳤다.

한 때 군주였던 자신을 문전박대 한 코라도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코라도는 기왕의 무능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왕은 코라도를 자신의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1189년 8월 28일 아크레 전투를 개시한다.

 

코라도와 포로였던 기사들은 아크레 공격에 가담하게 된다.

한편 살라딘은 아크레를 돕기 위해 달려온다.

살라딘에게 원한이 깊은 성전 십자군들도 아크레로 달려 오고 살다린의 요청으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슬람 기병들도 모여든다.

1189년 10월 4일, 양쪽의 병사들이 아크레 앞에서 맞닥드리게 된다.

 

그리고 곧 물러설 수 없는 전투가 벌어진다.

처음엔 기사들이 우세했지만 그것은 살라딘의 유인 작전이었다.

이슬람의 반격에 혼비백산 달아나는 기사들.

살라딘은 끝까지 쫒아가서 이 전투를 끝내려 했다.

하지만 너무 지친 이슬람 병사들과 참모들이 휴식을 원했다.

살라딘은 어쩔 수 없이 전투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3차 십자군의 참전과 십자군의 분열

 

전열은 가다듬은 코라도 진영.

다시 공성전이 벌어지는데 서로 포위와 포위를 하는 양상의 대치상태가 시작된다.

아크레성은 십자군들에게 포위당했고, 살라딘은 십자군을 포위했다.

거기에 3차 십자군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가세함으로써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잉글랜드 리처드 1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가세는 살라딘 진영에게는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1세가 살레프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숨지는 일이 일어난다.(1190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 1세가 죽자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치중이던 코라도 군대가 반격을 시도했지만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한테 수 천명이 죽는 패배를 당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코라도 진영에 전염병이 돌아 시빌라 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코라도도 티루스로 돌아가야 했다.

드디어 1191년 5월 3차 십자군 필리프 2세의 군대가 도착하고, 6월 8일에 리처드 1세가 아크레에 도착한다.

 


3차 십자군과 살라딘의 아크레 공방전

 

전염병이 퍼지는 십자군 진영.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협상을 하려 했으나 살라딘은 거부한다.

이에 화가난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와 함께 아크레 성을 공격한다.

양 진영은 서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서로 많은 수의 사상자를 내고 1191년 7월 3일 십자군은 일단 물러간다.

 

십자군은 물러갔지만 아크레 수비대는 오랜 전투로 모두 지쳐 있었다.

지친것도 지친거지만 리처드 1세의 잔인하고 용맹스런 모습에 기가 눌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크레 수비대는 살라딘을 제쳐 두고 너무나도 불리한 협상을 진행했다.

(리처드 1세 군대가 아크레를 점령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학살이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봐서

협상에 의한 아크레 성의 접수라 생각한다.)

죽이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아크레의 수비대는 리처드 군대의 인질이 되어버렸다.

 

7월 중순부터 살라딘이 나서 인질협상을 시작한다.

그 와중에 필리프 2세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프랑스로 돌아간다.

핑계는 그렇지만 리처드의 오만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에 화가 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해도 리처드 1세가 많은 이익을 챙길게 뻔해서 리처드 1세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5세도 리처드 1세의 무례한 행동을 문제 삼아 그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사실 리처드의 무례함을 핑계 삼았지만 오스트리아 또한 이 전쟁으로 자신들의 이익이 없을거라 생각해서 철군을 한 것이다.

결국 리처드의 군대만 남았다.


야파 점령과 리처드 1세의 고민

리처드 1세는 다시 살라딘을 압박하며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했다.

살라딘은 십자군을 저지하기 위해 십자군의 뒤에서 공격했지만 소용 없었다.

살라딘은 많은 피해를 입고 퇴각했으며, 야파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성벽을 부수고 아슈켈론으로 철수했다.

리처드 1세는 그렇게 야파를 점령했다.

 

야파를 점령한 리처드 1세는 세 가지 방법을 놓고 고민했다.

첫째, 예루살렘 공격.

둘째, 아슈켈론 공격.

셋째, 협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방법.

 

리처드 1세는 아슈켈론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다른 지휘관들은 예루살렘을 공격해야 한다고 반대했다.

리처드 1세는 고민에 빠졌다.

결국 예루살렘과 아슈켈론을 동시에 공격하면서 외교적 협상도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살라딘은 아슈켈론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전투를 준비했다.

리처드 1세는 평화협정을 제안했지만 살라딘은 거부했다.

동생인 알 아딜의 기독교 개종 조건이 있어서였다.


십자군의 분열

 

시간은 살라딘의 편이었다.

리처드 1세의 본국인 영국에서는 막내 동생인 존이 필리프 2세와 손을 잡고 리처드의 영토를 노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십자군들은 눈앞에 있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자고 아우성이다.

마음이 조급해진 리처드 1세는 갈등을 했다.

 

어쩔 수 없이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을 공격한다.

하지만 살라딘의 군대가 방어준비를 철저히 해서 전투는 쉽지 않았다.

만약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하더라도 살라딘이 해상을 봉쇄한다면 예루살렘을 지키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리처드 1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이집트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다른 지휘관들이 반대를 했다.

결국 리처드 1세의 십자군들은 회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회군 후에도 내부에서 의견이 서로 엇갈리고 분열 조짐을 보이면서 이집트 원정은 물거품이 되었다.


리처드 1세, 살라딘과 평화협정을 맺고 고향으로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상황이 된 십자군은 고향으로 가야했다.

거기에다 필리프 2세가 존과 함께 자신의 영토인 프랑스 지역을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마음이 급한 리처드는 협상을 해야했다.

 

1192년 9월. 양 진영은 오랜 기간 전쟁으로 모두 지쳐 있었다.

리처드도 열병에 걸리고 살라딘도 몸이 많이 쇠약해져 서로에게 평화가 필요했다.

리처드는 살라딘과 3년간 휴전한다는 평화 협정을 맺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이 협정이 라믈라 평화 조약이다.

 

협정의 조건은

1. 야파에서 티레까지의 십자군 영토를 인정한다.

2. 기독교도들의 성지 순례를 보장한다.

3. 아슈켈론은 이슬람에게 돌려준다.

 

3차 십자군 전쟁도 결국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했다.

2차 십자군 전쟁의 패배 원인이 분열이었는데 이번에도 실패의 원인은 분열이었다.

하지만 이슬람 국가들에게도 큰 타격을 준 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끝나고 다음해인 1193년 세상을 떠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치르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이익이 줄어드는 순간 분열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다른 민족, 다른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학살을 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킬 수 없는 한계 상황이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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