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십자군과 사자심왕 리처드의 등장

2024. 3. 12. 10:00역사/유럽역사 이야기

2차 십자군 원정은 실패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십자군 내의 분열이었다.

원정 실패 이후 프랑스의 왕은 자신의 아내인 엘레오노르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못난 행동을 한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교황청에 이혼신청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글을 참조하시길...

[역사/유럽역사 이야기] - 2차 십자군 전쟁의 실패 원인

 

2차 십자군 전쟁의 실패 원인

2차 십자군 전쟁은 1차 십자군 전쟁과 다른 부분이 많다. 1차 십자군은 군중들, 불우한 사람들이 대부분 참여했지만 2차 십자군은 종교계의 실력자와 서유럽 최강의 왕과 황제가 참여한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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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차 십자군의 실패는 서유럽 국가들과 교황청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충격으로 교황인 우르바노 3세가 죽었다. 다음으로 즉위한 교황 그레고리오 8세가 3차 십자군을 모집한다.

리처드는 1187년 십자군 원정에 지원한다.

그리고 잉글랜드를 장악하고 십자군 원정에 나갈 생각뿐이었다.

이번 포스팅은 3차 십자군 전쟁을 이야기하기 전 사자심왕 리처드의 등장에 대한 이야기다.

주요 등장인물 : 엘레오노르, 헨리 2세, 헨리 2세의 아들들(사자왕 리처드, 조프리, 아들 헨리, 존), 필리프, 윌리엄 마샬

 

엘레오노르와 헨리 2세의 결혼

 

2차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는 이혼을 한다.

교황청에 이혼을 신청한 사람은 엘레오노르.

이혼 사유는 자신과 루이 7세는 같은 귀족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친척이라는 이유다.

교황청은 이를 받아들여서 둘의 이혼을 승인한다.(1152년 3월)

1152년 5월 엘레오노르는 이혼한 지 두 달만에 영국의 젊고 잘나가는 귀족 헨리 2세와 결혼을 한다.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 10촌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헨리와는 8촌 지간이었다.

근친이어서 이혼한 사람이 더 가까운 친족과 결혼을 하는 아이러니한 사건이다.)

 

헨리 2세가 1154년에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프랑스 보다 더 부유한 국가가 된다.

당시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 보다 급이 낮았는데 엘레오노르가 프랑스의 아키텐 지방을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가자 헨리 2세가 더 부자가 된 것이다.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는 처음에는 금슬이 좋았다.

두 사람 사이에 8남매의 아이가 태어난다.

그러나 야심이 많은 엘레오노르와 바람둥이 헨리 2세 사이는 점점 벌어져 급기야 내전까지 하는 관계가 되었다.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 사이에 태어난 8남매
1. 윌리엄(1153~1156년 사망)
2. 아들 헨리(1155년 생)
3. 마틸다(1156년 생)
4. 리처드(1157년 생)
5. 조프리(1158년 생)
6. 엘레오노르(1161년 생)
7. 조안(1165년 생)
8. 존(1167년 생)

왕인 헨리 2세는 존을 편애했고, 엘레오노르는 리처드 왕자를 가장 아끼고 사랑했다.

 

엘레오노르. 상상화

엘레오노르, 아들을 움직여 남편을 치다

 

헨리 2세는 정치적 역량은 뛰어났지만 여러 곳에 적을 만들고 다녔다.

오만함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자신이 프랑스 왕보다 더 부유한 국가의 왕이 된 것도 엘레오노르 덕분이었다.

하지만 엘레오노르와 사이가 나빠져 결국 내전을 치르게 된다.

그리고 성당 안에서 기도를 올리던 베케트 대주교를 죽이도록 부하들을 사주해 교황청하고도 사이가 멀어졌다.

 

1173년. 이런 상황 속에서 헨리 2세 아들 3형제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아들 헨리, 리처드, 조프리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헨리 2세는 아들들의 반란에 배후가 있을거라 확신한다.

프랑스 조정과 자신의 부인인 엘레오노르.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를 잡아 감금한다.(감금 기간은 1173년~1189년 16년 간이다.)

엘레오노르의 지원이 끊긴 아들들은 버틸 수 없었다.

아들들은 헨리 2세 앞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 

 

리처드, 한 번 더 아버지와의 전쟁을

 

엘레오노르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아들 리처드에게 아키텐을 넘겼다.

하지만 그곳의 귀족들은 리처드를 받아들일 수 없어 반기를 들었다.(1179년 부터)

거기에다 첫째 아들 헨리는 아버지인 헨리 2세에게 왕권을 나눠가지면서 리처드에게 충성을 강요했다.

순순히 맹세 할 리처드가 아니었다.

헨리 왕자는 1183년 동생 조프리를 끌어들이고 아키텐의 귀족들과 연합하여 동생인 리처드를 친다.

이번엔 형제들끼리의 전쟁이다.

참으로 비정하다.

헨리 왕자는 동생과의 전쟁 중 이질에 걸려 숨을 거둔다.

 

형 헨리가 죽자 동생 조프리는 자신이 아키텐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의 새로운 왕에게 도움을 청하러 파리에 간 조프리는 갑자기 죽는다.

조리프의 죽음은 배후가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프랑스는 루이 7세가 죽고 필리프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필리프는 리처드와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필리프는 조프리를 후원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게된 리처드가 자객을 보냈거나 프랑스의 필리프가 또 다른 제안을 받고 조프리를 죽였을 수 있다.

아무튼 조리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리처드가 잉글랜드를 접수하는데 한 걸음 나아가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알게된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는 막내아들 존의 영향력을 키워 리처드를 견제하려 한다.

리처드는 아버지와의 전쟁을 피하지 않았다.

교황청의 중재도 거부했다.

그 당시 교황청의 권위는 대단한 것이었는데 리처드는 거부한 것이다.

프랑스의 왕 필리프의 지원을 받은 리처드는 아버지와의 전쟁에 들어간다.(1188년~1189년)

 

리처드, 잉글랜드를 접수하다

 

헨리 2세의 고향인 르망을 공격한 리처드와 필리프.

리처드는 도시를 파괴하고 학살을 저질렀다.

지난 아키텐의 반란을 진압할 때도 잔인무도하게 행동하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반감을 샀던 리처드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기사가 있었으니 윌리엄 마셜이었다.

잉글랜드 최고의 기사 중의 기사였다.

진검승부를 하게 된 두 사람.

 

이 승부에서 마샬은 리처드를 죽이지 않았다. 대신 리처드가 탄 말을 죽였던 것이다.

왕비인 엘레오노르와의 인연과 리처드가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살아난 리처드는 아버지인 헨리 2세에게 달려간다.

아버지는 믿었던 막내아들 존이 리처드의 부하장수가 되었다는 소식에 온 몸에 힘이 빠졌다.

1189년 7월 6일. 헨리 2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왕자 시절부터 십자군 원정을 준비한 리처드.

이렇게 왕권을 쥔 리차드는 더욱 잔인한 전쟁을 준비 한다.

헨리 2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젊어서는 내전에 참가해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했고, 로마 교회의 지배도 거부했다.
주군인 프랑스도 위협할 만큼 국력을 키웠다.처자식과의 싸움으로 거대한 왕국을 지켜냈다.정치가로서도 평이 좋았다.
잉글랜드는 부유했고, 나라 안의 유대인들도 안심하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식들과의 전쟁은 가장 큰 오점이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자식들끼리 싸우도록 부추긴 점도 커다란 오점이다.

 

다음은 3차 십자군전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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