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악의 악녀이자 악질 친일파 박마리아

2025. 3. 31. 12:24인물이야기/역사 속 인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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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28일 새벽 5시 20분 경.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의 공관에서 총성이 울린다.

그리고 그의 가족 4명이 모두 숨진 채 발견된다.

공식적인 발표로는 첫째 아들인 이강석이 나머지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집단 자살로 발표한다.

그러나 정확한 사인을 알 수 없다.

이 가족은 왜 이렇게 비극적을 맞이했나?

이기붕의 아내이자 악질 친일파였던 박마리아에 대해서 알아보자

 

대한민국 최악의 악녀 박마리아

 

박마리아, 가난하게 태어나 돈에 환장한 여자

 

박마리아는 1906년 강른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변절한 정춘수 목사의 집에서 가정부생활을 하면서 그녀를 교육 시켰다.

그래서 그런지 돈에 환장한 여자였다.

당시 개성에 있던 호수돈여고를 나와 이화여자 전문학교에 입학한다.

박마리아는 미국인 선교사이자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의 후원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그곳에서 이기붕을 알게 된다.

둘은 약혼을 했지만 1931년 갑작스럽게 박마리아가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결혼까지 하지 못했다.

한국으로 들어온 박마리아는 이화여대에서 교수로 재직을 하면서 YWCA의 총무를 맡아서 일을 하기도 한다.

이기붕도 이 시기에 한국에 들어와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지만 이 둘은 1935년에 결혼을 한다.

 

박마리아, 본격적으로 친일을 행위를 한다

 

'돈이면 다 되는거야', '돈만 많으면 괜찮아'라는 말을 퍼뜨린 장본인이다.

그런 박마리아는 이기붕을 일제 당시 개성에서 가장 큰 관광나이트인 국일관의 총재배인으로 취직시킨다.

국일관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대표적인 친일파인 최남수가 운영을 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최남수의 마름 노릇을 하면서 전국에 있는 친일파들을 관리하게 된다.

당시는 일제시대였기 때문에 이곳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일본인이거나 친일파들 이었다.

이때부터 박마리아와 이기붕의 친일, 반민족적 행위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박마리아는 이른바 요정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1935년 부터 1945년까지 총독부의 고위 관리와 친일파 고위 관리들에게 접대를 하는 고급 호스티스 역할을 한다.

당시만해도 이화여대 교수, YWCA의 총무 역할을 했던 시기였으니까.

 

이기붕, 이승만에게 서울시장 자리를 받다

 

이기붕은 박마리아의 남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꼬붕이나 마찬가지다.

해방이 되고 이승만이 한국에 들어온다.

이기붕은 과거 미국에서 한 달 정도 이승만의 비서를 했던 인연이 있었다.

박마리아는 이것을 알고 이기붕에게 이승만을 만나라고 시킨다.

이기붕은 이승만을 찾아가 자신이 친일파 고위 관리들을 관리하는 국일관 총 지배인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에게 서울시장 자리를 달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 또한 박마리아가 시킨것이다.

이승만은 우선 자신의 비서실장으로 일을 하라고 한다.

그리고 1949년 이기붕을 서울시장으로 앉힌다.

그러고 얼마 후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한다.

이승만은 전쟁이 나자 헐레벌떡 서울을 빠져나간다.

이기붕은  미국의 제임스 하우스만 장군에게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한다.

"백성들은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을 살려야하기 때문에 인도교를 폭파해야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다.

이후에 모든 책임을 최창식 공병감에게 뒤집어 씌워서 총살형을 내린다.

 

박마리아, 끝없는 악행을 자행하다

 

박마리아는 한반도 역사에서 최악의 여자로 손꼽힌다.

마치 지금의 최고 권력자의 마누라 처럼.

박마리아의 악행은 끝이 없었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이 대사는 타짜에서 김혜수가 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박마리아가 원조다.

해방 이후 미 군정시기.

몽양 여운형 선생이 고든장군을 찾아가서 자신에게 권력을 주면 친일파를 처단하겠다고 말한다.

박마리아가 여운형 선생을 찾아간다.

"선생님은 영어도 잘하면서 왜 이승만의 편에 서지 않느냐? 지금은 사는게 중요해요. 돈만 있으면 다 되는거에요.

무슨 친일파 척결이에요?"라고 하면서 따진다.

"호스티스 주제에 너 단골들이 모두 친일파들이라고 나에게 이래도 되는거냐?"

여기서 희대의 명언이 나온다.

"호스티스라니요? 저 이대 나온 여자에요"

그러면서 한마디 더 한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일수도 있다고.

그러고 한 달 후 여운형 선생이 암살 당한다.

 

독립군 이범석 장군

 

박마리아의 또 다른 악행이다.

1952~54년까지 자유당이 두 개가 있었다.

원내 자유당은 이기붕이 속해있는 여당이고, 또 하나의 자유당은 독립군이었던 철기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원외 자유당이었다.

이범석 장군은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초대 국무총리를 한 인물이다.

이런 이범석 장군이 민족청년단을 조직해 이승만 정권과 맞서게 된다.

박마리아는 이승만의 마누라인 프란체스카 옆에서 이간질을 하면서 이승만으로 하여금 이범석 장군을 숙청하려고 했다.

이 사실을 안 이범석 장군의 부인인 김마리아 여사가 박마리아를 찾아가 따진다.

김마리아 여사도 남편과 함께 독립군으로 활동을 한 여자였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승만은 이범석을 정치적으로 숙정을 한다.

 

이범석 장군의 부인 김마리아

 

박마리아의 또 다른 악행은...

 

1948년 2월에 반민특위 (반민족행위자 특별 조사 위원회)가 출범해 1949년 6월 강제해산된다.

여기에서도 박마리아가 역할을 한다.

박마리아는 일제시대때 판사였던 장경근을 만나 반민특위에 잡혀온 사람들이 자신의 국일관 단골이라면서 반민특위를 해체시키려 한다.

그리고 장경근을 조종해 반민특위 위원장이었던 김상덕을 간첩으로 몰아서 반민특위를 해체시킨다.

우리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악행을 스스럼없이 일삼은 여자다.

 

박마리아, 아들을 이승만의 양자로 보내다

 

이승만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원래 자식이 있었으나 어렸을 때 죽었다.

그런 이승만에게 접근한 박마리아는 자신의 첫째 아들인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보낸다.

아들을 양자로 보낸이유도 이기분이 대통령이 안되더라도 아들을 통해서 권력을 승계 받을 생각이었다.

실제 박마리아는 왕정 복구를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이런 이강석을 서울대 법대에 대통령 추천 전형으로 강제 입학시킨다.

서울대 총장이 이강석이 등교할 때 뛰어 나왔다는 일화도 있다.

 

이승만 부부와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이강석, 프란체스카 도너, 이승만,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

 

박마리아, 국민을 개 돼지로 알다

 

1950년 1월 1일 부터 1958년까지 미국은 한국에 28억달러의 원조를 한다.

조봉암 선생은 미국의 원조를 무상교육과 무상의료에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마리아는 생각이 달랐다.

자신들이 그 돈을 나눠가지고 자신들이 쓰고 흘린돈을 국민들이 쓰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이른바 '낙수효과'라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이런 낙수효과에 빠져서 경제민주화를 저해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박마리아의 눈에 국민은 개, 돼지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강석, 경찰을 폭행하다.

 

불법적으로 서울대에 들어간 이강석은 동료들로 부터 왕따를 당했다.

서울대 법대생들이 항의를 하면서 동맹휴업을 하고 이강석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화가난 이강석은 술을 마시고 만취한 상태에서 차를 몰았다.

그것을 본 경찰이 그를 붙잡아 조사를 하려고 했지만 이강석은 자신의 신분을 내세워 경찰을 폭행한다.

그리고 경찰은 이강석을 붙잡은 경찰을 일주일간 구류를 살린다.

이승만의 양아들을 건드린 댓가였다.

함께 탄 여성이 있었는데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공권력이 개인의 권력에 무너지는 장면이었다.

지금도 공권력을 이용해 사적인 권력을 지키려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완전히 썩은 사회, 이강석을 사칭한 사기 사건이 발생하다

 

이강석이 술을 마시고 경찰관을 폭행하던 그 시간(1957년).

경북에서는 엄청난 양의 비가 와서 물난리가 나서 150여명이 숨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정부는 이 국민들을 돌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시간 이강석을 사칭한 청년이 경북도시가와 경북청찰서장 등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지내는 사건이 일어난다.

경북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사진의 출세를 위해서 온갖 뇌물을 바친 사건이었다.

서울법대를 다니던 경북도지사의 아들이 내려오면서 가짜라고 드러나고 구속이 된 사건이다.

사회가 얼마나 썩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1960년 4월 19일 자신의 생일에 이승만이 하사한 비단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시위를 하던 민중들은 경찰의 총에 피를 흘리고 쓰러지던 날의 모습이다.

 

3.15 부정선거, 4.19혁명, 그리고 이기붕 가족의 몰락

 

1960년 3월 15일 선거가 있었다.

대통령은 이승만 단일후보여서 부통령 자리를 두고 다투는 선거였다.

직전 선거에서 부통령 자리를 뺏겼던 이기붕은 확실하게 부통령이 되기 위해 부정선거를 저지른다.

민심은 들끓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서 민중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도 이 시위에 참가했다.

박마리아는 이정재를 불러 자신의 생일인 4월 19일 전에 해결하라고 닥달한다.

이정재는 깡패들을 데리고 가서 학생들을 무자비한 폭행을 가한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민중들의 시위를 깡패를 동원해 진압하려 했다.

하지만 민중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다.

급기야 경찰이 민중들을 향해 총을 쐈다.

4월 19일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의 일이었다.

그런날 박마리아는 자신의 생일을 자축하며 이승만이 내려준 비단을 들고 환하게 웃으면서 사진을 찍는 모습까지 보인다.

민중들은 경찰의 총에 죽어가는데 국민들의 목숨은 중요치 않았다.

이기붕은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총을 쏘라고 줬지 가지고 놀라고 준것이 아니다"고 말하면서 더욱 분노를 키웠다.

악마가 따로 없다.

시위는 점점 더 격해졌다.

이승만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급기야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를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틀 뒤, 박마리아 가족들은 모두 총성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지금도 남편의 권력을 배경으로 국민들을 개 돼지로 알고 짓밟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는 그런 행위에 대해서 반드시 응징한다는 교훈을 남겨야 한다.

그래야 내 아이들이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친일 청산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었는데 너무나 안타깝다.

언젠가는 반드시 청산을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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