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영어가 망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2025. 3. 25. 11:41인물이야기/역사 속 인물 이야기

반응형

이번 포스팅은 구한말 찹쌀떡 장수였던 천민이 영어 하나로 법부대신, 외무대신이라는 신분상승을 이룬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아울러 우리나라 영어가 왜 이렇게 많은 돈을 퍼붓고도 영어실력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하는지 이야기 해 봅니다.

내 생각이 여러분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나의 생각을 적은것이니 의견을 존중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영어 사교육 시장은 정부의 공식 통계로는 15조원이라고 합니다.

대치동이나 사교육 업계에서는 22조원 정도로 보는데 몇 년전 통계니까 아마도 지금은 더 커졌으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았을거라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어를 이렇게 오랫동안 교육을 하는데 영어가 안되는 이유가 바로 영어교육의 방법과 정책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국과의 통상으로 영어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다

우리나라가 영어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건 개화기때부터 입니다.

그 전에는 주로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를 중요시 여겼으니까 굳이 영어에 대한 필요성을 못느꼈던거죠.

그러니까 1882년(고종)에 우리나라가 미국과 <조미수교통상조약>을 맺습니다.

그런데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에 통역이 가능한 사람을 지원 요청합니다.

청나라에서 국제법을 잘 알고 있는 마건충이라는 외교관, 영어를 아는 중국인 통역관이 들어옵니다.

영어를 모르는 조선과, 한국말을 모르는 미국인 사이에 중국인이 통역을 하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중국인들은 통역과정에서 자신들이 유리하도록 장난을 칩니다.

그래서 <조미수교통상조약>이 친중 종약으로 만들어진겁니다.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조약을 대충 마무리하고 5년 후 다시 올테니까 영어 공부를 하라고 하면서 협상을 마무리 짓습니다.

 

출발 전 보빙사. 뒷줄 왼쪽부터 현흥택, 최경석, 유길준, 고영청, 변수. 앞줄 왼쪽부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법, 로웰

고종,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이 아주 큰 충격에 빠진거죠.

그래서 고종은 다음해인 1983년에 미국에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으로 이루어진 보빙사라는 사절단을 보낸다.

여기서도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퍼시빌 로웰이라는 미국인과 함께 보냅니다.

이 미국인은 한국말을 하는게 아니라 일본어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조선어를 아는 일본인을 보빙사에 데리고 갑니다.

이 로웰을 잘 기억하십시요.

아뭏든, 배타고 여러날을 걸려 워싱턴에 도착한 보빙사.

그런데 미국 대통령이 뉴욕에 출장을 간 상태입니다.

다시 보빙사는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뉴욕의 맨하탄으로 달려갑니다.

거기서 이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충격을 넘어선 공포를 느끼게 된거죠.

그때 당시 뉴욕은 지금의 뉴욕의 모습을 거의 다 갖춘 상태였습니다.

2Km가 넘는 맨하탄과 블루클린을 잇는 교량도 있었던 상태였죠.

거기에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이후였기 때문에 거리에 불빛이 공포스러웠을 겁니다.

당시 보빙사 중 한 명이었던 유길준은 '이것은 사람이 불을 켠 것이 아니라 악마가 켰을 것으로 안다'고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 한가지의 에피소드.

뉴욕에 도착한 사절단은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서양예법을 배우긴 했지만 절을 하지 않는다는 정도였죠.

그 상황에서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게 되는데 일제히 절을 한 것입니다.

상대국의 왕을 봤으니까 조건반사적으로 한 것이죠.

이 장면은 당시 뉴욕타임즈에 삽화로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보빙사로 갔던 조선인이 미국의 아서 대통령을 보고 절을 하고 있다.

고종, 영어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만들다

 

미국에 보빙사로 다녀온 사절단이 미국의 모습에 대해서 고종에게 보고를 합니다.

보고를 들은 고종 또한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거죠.

철마가 달리고, 전등을 밝게 켜고 살고,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다고 하니 당연히 충격이었겠죠.

그래서 고종은 영어를 국가 차원에서 교육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1886년에 우라니라 최초의 국립영어학교인 육영공원을 만듭니다.

영재를 육성한다는 의미로 만든거죠.

그리고 미국의 선교사인 헐버트, 길모어, 벙커등을 초빙해 원어민 수업을 합니다.

여기서는 영어 뿐만 아니라 서양 역사와 수학도 함께 교육을 했죠.

고종은 이곳의 시험을 직접 주관하면서 관심을 크게 보였습니다.

시험은 미국인 교사가 영어로 얘기하면 그것을 받아 쓰는 방식이었죠.

미국의 발전상과 강한 힘의 원천을 알게 된 고종은 이렇게 영어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특채를 하겠다고 선포합니다.

신분적 차별을 두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는 것이죠.

 

과거 육영공원 수업장면을 AI로 재구성한 이미지.

 

찹쌀떡 파는 소년, 고종 곁으로 가다

 

당시 부산에서 찹쌀떡을 파는 천민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알렌이라는 미국인이 부산포에 들어왔을 때 알렌의 몸종으로 일하게 되죠.

그렇게 소년은 알렌에게서 영어를 배우게 되는데, 간단한 생활영어 정도 였을 겁니다.

그런데 알렌이 고종의 주치의가 되게 됩니다.

통역을 위해 이 소년을 데리고 가야 하는거죠.

당시 조선은 천민은 궁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고종이 소년에게 벼슬을 내려서 궁에 들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 소년은 알렌과 함께 고종을 곁으로 가게 됩니다.

이 소년이 바로 이하영이라는 사람 입니다.

 

이하영이 알렌의 통역을 하니까 고종은 초고속 승진을 시킵니다.

나중에 법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까지 승진을 하게 되죠.

영어 하나 때문에 이렇게 된거죠.

이후 이 사람이 이후 을사늑약(1905년) 때 법부대신으로 늑약 체결에 역활을 힙니다.

이하영은 친일반민족해위자로 민영기, 이재극과 함께 을사삼흉 중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얘기 할 생각입니다.

 

조선의 영어 열풍과 일본의 식민지 교육 정책

 

이하영에 대한 소문이 전국으로 퍼지게 됩니다.

찹쌀떡 팔던 천민이 영어 때문에 궁궐에 들어가게 되었으니까요.

특히 제물포(인천)와 부산세관의 경우에는 공식 업무가 영어였는데 아주 간단한 영어만 할 수 있어도 영어를 모르는 조선인 보다 10개가 넘는 월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선에 영어 열풍이 불면서 한국인들이 영어를 아주 잘 하게 되는 거였죠.

선교사들 증언으로는 조선인이 아시아에서 제일 영어를 잘했다고 하네요.

발음도 좋고 학습 능력도 우수하다는 평이었죠.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뺏기고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면서 일본은 조선인들이 영어를 배우지 못하게 합니다.

거기에다 일본은 일본어에 능통한 사람만이 교가사 될 수 있다는 교칙까지 내립니다.

그래서 미국인 교사들은 더 이상 조선에서 수업을 할 수 없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댜.

그리고 모든 교사들을 일본인 교사로 대체합니다.

이런 일본인 교사들의 수준이 어느정도였냐면, 1920년 보성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의 수준이 너무 낮아 동맹휴업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문장의 5형식, 한국의 영어를 망치다

 

근데 결정적으로 우리나라 영어 교육이 망가진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 경성제국대학이 있었는데, 이 대학에 입학하려면 일본어, 영어, 수학 세 과목의 시험을 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전 고종때 시험 방식으로 하면 일본인들이 들어갈 수가 없는거죠.

그래서 일본은 문법과 해석 위주의 시험을 치게 한거죠.

그리고 어려운 문장을 구성해서 지원한 사람들을 떨어뜨리는 시험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본인 교사가 복잡한 영어를 쉽게 해석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문장의 5형식입니다.

우리가 100년이 넘도록 배우고 있는 영어가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어인거죠.

성문영어, 맨투맨...이런 것들.

이렇게 시험위주의 영어가 지금의 영어교육을 망친거라 생각합니다.

원어민들도 해석이 어려운 지문을 만들어서 시험 문제로 출제를 하는 행태도 사라져야하죠.

이렇게 해서는 외국인과 한마디 말도 못한다는게 원어민들의 지적입니다.

 

훗카이도 대학교의 클라크 박사 동상. 동상 아래에 Boys, be ambitious 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Boys, be ambitious! 원래는 누가 사용했냐면

 

우리가 잘 아는 문장이죠.

내가 학교 다닐 때도 많이 들었던 말이죠.

그런데 저 말을 영국의 수상 처칠이 한 명언으로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일본 훗카이도 대학교의 클라크 교수가 일본 학생들에게 한 말입니다.

일본인들이 이 말이 너무 멋있어서 모든 예문에 사용한 거죠.

그리고 우리나라에 그대로 가지고 온거구요.

이렇게 일본의 잔재가 우리나라의 교육에 뿌리깊게 박혀 있네요.

씁쓸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