떵떵거리며 사는 친일 후손들 - 민병석의 후손들

2025. 3. 27. 12:09인물이야기/역사 속 인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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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합병당한 날이다.

실제 서명일은 8월 22일이었으나 발표는 29일에 했다.

친일을 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들을 기억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런 역적들의 이름이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에도 나오지 않으니 참으로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술국적 8인은 이완용, 윤덕영, 조민희, 민병석, 고용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등 8인이다.

오늘은 경술국적 8인 중 민병석과 그의 아들에 대해서 알아본다.

친일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리며 살고, 독립운동을 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말이 있다.

이 잘못된 세상이 빨리 제대로 된 세상으로 바뀌었음 한다.

 

국민들을 착복하며 개인의 욕심만 챙긴 인물 

 

민병석은 민경식의 아들이다.

조선의 민씨라고 하면 세도가문으로 유명하다.

조선 태종의 아내도 민씨 왕후였다.

조선이 일본에 빼앗기는데 이완용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경술국적 8인 중 가장 악질인 인물일 것이다.

민병석과 이완용이은 절친이자 사돈지간이기도 하다.

1858년에 태어났으며 민관식의 아들인데 민경식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민병석 이 사진은 경술국치 조약을 조인한 이후에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일본의 왕에게 보여질 사진이라 직접 서양 이발사에게 머리 손질까지 한고 찍었다고 한다. 나라를 팔아먹고 이렇게 하고 싶은지...참으로 참담하다.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다.

 

민병석은 구한말 정부의 여러 요직을 거친 인물이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국민들을 엄청나게 착복해서 비난을 샀다.

평안도 사람들은 민병석을 죽이고 싶은 존재로 여겼다.

 

민병석은 원래는 친청파였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민병석을 죽이려 한다.

민병석은 무릎을 꿇고 빌면서 살려달라고 한다.

이렇게 살아난 민병석은 이완용과 함께 일본을 위해 일하는 척 하다가 친러파가 된다.

하지만 민병석은 예조참판(외교부)을 지내며 일본이 러시아 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완용과 함께 친일파로 변절한다.

여담이지만 이완용이 을사오적이 된 것도 민병석이 뒤에서 꼬드겼다는 설도 있다.

 

순종 황제를 납치하려하다.

 

순종이 부산으로 순행을 할 때 순종황제를 납치하려 한다.

순종이 조선에 있는 것이 한일 합병에 걸림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납치 계획은 부산항의 노동자들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리고 순종황제의 일본행을 저지하면서 실패하고 만다.

노동자들이 바다속에 몸을 던져 순종의 일본행을 막았던 것이다.

민병석을 할 수 없이 순종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우리나라는 민중들은 저항의 DNA가 있는 나라인것 같다.

 

일본에 조문을 하려다 쫒겨나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민병석을 일본으로 조문을 가려고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그의 조문을 받지 않으려 했다.

조선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다.

민병석은 우리 조선은 이미 천황폐하의 신민이 되기로 결정했으며, 하해와 같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빌면서 조문을 구걸한다.

하지만 결국 조문을 못하고 일본에서 쫒겨난다.

 

1909년 12월 이완용은 명동성당에서 독립운동가인 이재명 의사에게 칼에 찔려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 소식을 들은 민병석은 나라를 잃은 것 보다 더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완용이가 죽지 않고 살아났다.

민병석은 만세를 부르면서 좋아했다고 한다.

 

1911년 민병석은 이왕직 장관에 임명된다.

합병 이후 일본은 조선의 황실을 이왕가(李王家)로 강등하고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구를 설치해 조선 황실을 형식적으로 유지한다.

그 기구의 장관으로 앉아서 조선 황실을 감시하고 황실 재산을 일본이 관리하도록 했으며, 일본 황실의 부속 기구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운다.

이렇게 철저하게 일본을 위해 일한 대가로 일본에서 작위를 받게된다.

 

조선인들을 전쟁터로 내몰다

 

민병석은 중일전쟁(1937년)과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1939년에 민병석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으로 임명된다.

중추원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하는 기구다.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조선인들이 받아들이도록 활동을 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조신의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는데 몰두한다.

 

대를 이어 친일파 노릇을 하다

 

민병석의 둘째 아들이 민복기다.

민복기는 아버지 민병석이 조선을 일본에 넘긴 3년 후인 1913년에 태어났다.

해방이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민복기는 아버지의 덕을 톡톡히 본다.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나왔다는 이유로 이승만의 눈에 들어 이승만의 법무 비서관으로 공직을 시작한다.

1966년 법무장관으로 재임하던 때 국회 대정부 질문에 출석 했다가 김두한에게 똥물을 얻어 맞은 인물이기도 하다.

 

민복기는 이승만 정권에서 법무비서관으로 시작해 박정희, 전두환 정권까지 아주 잘 나간다.

법무부차관, 검찰 총장, 대법원장까지 지낸다.

민복기 대법원장 때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난다.

인혁당 사건은 8명을 사형선고하고 하루가 채 되지도 않은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한다.

무자비한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증거로 채택하면서 고문이 있었다는 증거다 없다는 개좆같은 논리를 들이댔다.

2007년 94세의 나이로 편안한 삶을 살다가 죽었다.

그의 편안한 삶 뒤에는 국민의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 있었다.

 

악질친일파 민병석의 아들 민복기

 

 

민병석의 후손, 국가 귀속된 땅을 찾아 가다

 

2005년에 친일재산환수법이 통과가 된다.

그리고 친일재산을 국가가 환수한다.

친일의 후손들은 악질적인 DNA를 버리지 못한다.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서 할아버지에게 받은 땅을 되찾아 간다.

묘소가 있는 땅은 환수대상에서 제외가 된다는 이유로.

 

2000년도에 서울대에서 자랑스런 서울대인을 발표하는데 거기에 민복기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대법원장을 역임했다는 이유다.

이러니 서울대를 없애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 같다.

 

우리 나라의 친일파들은 인맥과 혈맥으로 모두 이어져 있다.

민복기 마누라의 삼촌이 친일파인 이병도다.

이렇게 끈끈하게 엮인 사람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일을 하고 있으니 나라에 제대로 된 정의가 세워질 수 없지 않을까.

독립운동 후손들에게 국가가 제대로 된 집을 지어주고 예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가 자손들은 가난하게 살고, 친일을 한 후손들은 이렇게 떵떵거리면서 현실속에서 부모가 자식들에게 정의를 이야기 할 수 있겠나?

 

역사가 삶의 무기가 되는 그날까지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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