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4. 09:02ㆍ인물이야기/삼국지 인물 이야기
장료는 병주 안문군 마읍현 출신으로 본래 성은 장씨가 아닌 섭씨였다.
장료의 가문이 성을 바꾼 이유는 흉노족의 보복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한무제 시절 장료의 조상인 섭일이라는 인물이 흉노 선우에게 성을 바치겠다고 거짓 항복을 한다.
그리고 그를 한나라 병사들이 매복하고 있는 곳으로 유인하려 한 일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섭씨 가문은 흉노족의 원한을 샀다.
무장으로서의 위용과 지장의 면모까지 갖춘 몇 안되는 삼국지 인물이다.
조조의 밑에서 자리를 잡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장료의 삶을 따라가 보자.
장료, 주군이 계속 바뀌는 운명
후한 말 장료는 보통 사람에 비해 무력이 뛰어났고 젊었을 때 군의 관리에 임명되었다.
장료는 병주자사 정원의 눈에 들어 종사에 임명된 뒤 하진의 부름에 응한 정원을 따라 낙양으로 가게된다.
이후 장료는 하진의 명에 따라 하북지역으로 파견되어 병사 천여명을 모집했으나 그 사이에 하진이 십상시들에게 암살당했고 정원도 동탁에게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권력을 잡은 동탁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서 여포가 동탁을 암살해버리자 장료는 거리낌없이 여포의 휘하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포는 권력의 중추에 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각과 곽사의 군대에게 패해버렸고 이에 여포는 우여곡절 끝에 서주로 도망쳐왔는데 이때 장료는 여포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그를 따랐다.
그러나 결국 여포가 조조에게 패망하자 장료는 고순처럼 끝까지 여포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군대와 함께 조조에게 투항했다.
관우와 친하게 지낸 장료
건안 5년(200년).
서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비가 조조에게 격파당해 원소에게로 도주했을 때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불가피하게 그의 휘하에 들어갔고 이 시기에 장료는 관우가 자신과 같은 항장 출신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와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조조는 장료에게 관우가 자신의 곁에 얼마나 있을 건지 의중을 떠보라고 했고 이에 장료는 관우를 찾아가 언제까지 조조 휘하에 있을 거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관우는 반드시 공을 세워 조조에게 보답한 뒤 떠날 생각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장료는 관우의 말을 그대로 조조에게 알렸고 이에 조조는 관우를 의롭게 여겼다고 한다.
지장의 면모까지 갖춘 장료
창희는 유비가 원술을 토벌하겠다는 핑계로 조조에게서 벗어난 뒤 서주에서 반기를 일으키자 유비와 함께 했으며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원소에게 달아난 뒤에도 끝까지 항전했다.
이때 장료는 하후연과 함께 창희를 포위하고 있었는데 여러 달이 지나도 창희를 격파하지 못했고 군량이 점차 소진되자 장수들 사이에선 퇴각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장료는 하후연에게 자신이 창희를 설득시키겠다고 한다.
장료가 며칠 사이 적진을 순찰할 때마다 창희와 눈이 마주쳤는데 상대 진영에서 화살을 쏘는 일이 드물었다.
그것은 창희가 마음속으로 망설이고 있다는 증거일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료는 창희와 성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뒤 그와 만나서 먼저 귀부할수록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라 설득했고 이에 창희는 장료의 말에 수긍하며 곧바로 투항했다.
그러자 장료는 대담하게도 단신으로 창희의 집으로 가서 그의 처자식에게 예를 갖추니 창희는 장료의 행동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의심 없이 조조를 찾아가서 항복을 선언했다.
그런데 조조는 창희를 돌려보내고 장료만을 남긴 뒤 대장이 해서는 안될 행동을 했다며 꾸짖는다.
아무리 상대가 항복을 말했다고는 하나 지휘관의 신분을 가진 자가 단독으로 적진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킨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장료, 정확한 판단력으로 반란을 잠재우다
장료는 원소의 아들인 원상과 원담을 격파하는 전투와 형주의 유표를 공격하는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조조가 원상의 편을 든 오환족 선우 답돈을 토벌하기 위해 유성으로 진군할 때도 참전한다.
건안 12년(207년).
조조는 장료와 함께 적진을 살피기 위해 백랑산에 올랐다가 같은 목적으로 백랑산에 오른 오환족의 군대와 맞딱뜨리게 된다.
당시 조조의 군대는 무장이 빈약했던 반면에 오환족의 군사들은 수가 더 많았고 중무장을 하고 있었으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서 혼란에 빠진 상태가 되었다.
장료는 조조에게 곧바로 적을 공격하자 조언하였고 이에 조조는 장료를 장하게 여기며 그에게 대장기를 주어 선봉에 세운 뒤 오환족의 군대를 공격하라 명한다.
선봉에 선 장료가 기세 좋게 돌진하였고 오환족 군대의 진영은 붕괴되어 지휘관인 답돈과 수뇌부들은 사로잡혀 참수되었고 원상은 요동으로 도망쳤으며 20여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투항했다.
여강의 진란, 매성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조조는 우금과 장패에게는 매성을, 장료와 장합에게는 진란을 공격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런데 매성이 우금에게 거짓 항복을 하여 우금을 속인 뒤 진란에게 합류하였고 이들은 천주산으로 들어가 그 위에 보루를 쌓았는데 천주산은 높이가 20여 리에 길이 험하고 협소한 천혜의 요새였다.
휘하 제장들은 장료에게 길이 너무 깊고 험한데다 보유한 병사의 수가 적어 공격하는 것이 힘들다고 했으나 장료는 그대로 진란과 매성을 공격해 이들을 격파한 뒤 참수했다.
전투가 끝난 뒤 조조는 장수들의 공을 논하며 '천산의 험준한 곳에 올라 진란과 매성을 죽인 것은 탕구장군(장료)의 공이다' 라고 칭찬한 뒤 장료에게 상을 내렸다.
장료, 10만명의 오나라 군대를 물리치다
조조가 손권정벌(유수구 전투)에서 돌아온 뒤 장료와 악진, 이전에게 병사 7천명을 주어 합비에서 오나라 군대를 맡게 했다.
그리고 설제라는 인물에게는 서신을 주었는데 서신의 겉면에는 '적이 도착하면 뜯어보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건안 20년(215년).
손권이 병사 10만명을 이끌고 합비를 공격해오자 장수들은 조조가 준 서신을 뜯어보았는데 서신에는 만약 손권이 쳐들어오면 장료와 이전은 군을 이끌고 출진하라.
그리고 악진은 수비에 힘쓰고 설제는 싸움에 참여하지 말라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조조의 서신을 본 대다수의 장수들이 조조의 계책을 의아해하며 의심을 품자 장료는 '이 교서의 뜻은 적이 미처 집결하기 전에 요격해 그들의 예기를 꺾고 우리 군의 사기를 안정시켜야 적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이오.'라고 말했고 게다가 이전이 장료의 의견에 동조했기에 장료는 이전과 함께 출진하기로 결정한다.
장료는 그날 밤에 정예병 800명을 선발하고는 소를 잡아먹여 일전에 대비하였고 다음날 새벽이 되자 직접 갑옷을 입고 극을 든 뒤 선두에 서서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장료와 정예병들은 수십 명을 죽이고 두 명의 장수를 베고는 보루까지 뚫고 들어가 손권의 대장기 아래까지 이르렀다.
손권은 크게 놀랐고 그의 곁에 있던 장수들도 당황해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결국 손권은 장료의 기세에 위협을 느껴 고지대로 도망쳤고 장료는 손권을 쫓아가 욕를 하며 내려와 싸우자고 했으나 손권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이처럼 오나라 군대는 장료의 무용과 기세에 눌려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이내 장료가 이끄는 병사들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는 정신을 차린 뒤 장료를 여러 겹으로 포위한다.
하지만 장료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 포위를 뚫었고 뒤에 남은 병사들이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보고는 다시 포위망 안으로 뛰어들어 남은 병사들을 구해내는 위용을 보여준다.
이렇게 전투는 새벽부터 낮까지 계속되었는데 장료가 돌진하는 곳마다 오나라 군대는 무너져 내렸고 오나라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게 된다.
장료의 활약으로 인해 오나라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에 곤두박질 쳤다.
손권은 10여일 동안 합비를 공격했으나 어떠한 소득도 얻지 못했고 이에 손권은 퇴각을 결심한다.
오나라 군대는 차례대로 퇴각하였고 손권은 병사 1천명과 여몽, 장흠, 능통, 감녕, 반장, 진무, 송겸, 서성 등 오나라의 이름 있는 장수들과 소요진 북쪽(합비 북쪽)에 대기하고 있었다.
장료는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그 즉시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손권의 진영을 급습한다.
이때 장료군의 기습이 얼마나 빨랐는지 오나라 군대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당해 진무는 분투하다 죽었고 송겸과 서성은 도망쳤다.
나머지 장수들은 필사적으로 싸웠고 특히 여몽과 능통이 죽음을 각오하고 장료와 맞섰기에 손권은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다.
조비가 제일 아낀 장수
건안 25년(220년).
왕위에 오른 조비는 장료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그를 전장군으로 임명하였고 손권이 다시 모반을 꾀하자 장료를 합비로 파견하였는데 이때 장료의 모친에게 수레와 병마, 수행원들을 보내 장료의 가족들이 장료가 합비로 떠나는 길을 전송하게 하였고 수많은 장수와 관원들이 줄지어 서서 장료의 모친에게 배례하도록 시켜 장료의 명예를 드높여준다.
이후 황제가 된 조비는 장려의 식읍을 1,000호나 늘려 주었고 장료와 모친을 위한 특별한 저택까지 만들어주었고 장료가 오나라 군대를 격파할 때 그를 수행한 병사들을 모두 불러서 근위병으로 삼았다.
그리고 장료의 건강이 악화되자 조비는 유엽을 보내 궁중 의사를 데리고 가 장료의 병을 살펴보게 했고, 시간이 지나도 장료의 병이 나아지지 않자 직접 장료를 찾아가 그의 손을 잡으며 위로한 뒤 황제의 옷을 하사하고 황제가 먹는 음식까지 매일 보내준다.
이와 같은 조비의 정성 때문인지 장료는 건강을 되찾고 오나라 군대와의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으나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황초 3년(222년) 눈을 감았고 이에 조비는 눈물을 흘리며 장료에게 강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삼국지에서 뛰어난 장수는 너무나 많다.
그 중에서 장료는 뛰어난 무용은 물론, 정확하고 빠른 판단으로 전투를 승리를 이끄는 능력이 탁월한 장수다.
주군이 여러명 바뀌지만 조조 밑에서 정착하면서 그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패배가 없는 장수들은 대부분 오만함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관우가 그랬다.
그러나 장료는 조조의 뜻을 깊게 헤아리고 전쟁에 임했다.
조조와 그의 아들 조비가 그를 아끼고 좋아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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