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27. 09:47ㆍ역사/유럽역사 이야기
예루살렘의 파괴와 학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기 전, 마라트 안 누만의 학살을 통해 십자군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그 여세를 몰아서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 있었다.(1099년 6월 15일)
약탈과 학살을 통해서만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슬픈 현실이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십자군들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고 무엇이 인간의 행동인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왜 참전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잃었다. 단지 약탈을 통해 재산을 모으려는 욕심과 기사로서의 명예를 얻으려는 잘 못된 생각에만 관심이 있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벌어진 살육에 일부 십자군 스스로도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3대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지중해 세계 전체가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성지를 스스로 파괴하고 무너뜨리고 짓밟았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을 두고 벌이는 보에몽과 바임베르트 주교의 계책
한편 안티오키아를 차지하고 예루살렘으로 출전하지 않았던 보에몽은 예루살렘 함락 소식에 당황스러워 한다.
예루살렘으로 출전하지 않은 이유가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할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점령되었으니 당황스러울 수 밖에...
보에몽은 예루살렘을 가로 챌 생각에 몰두한다.
바로 그때 안티오키아에 교황의 특사가 도착한다.
바로 바임베르트 주교.
바임베르트 주교는 이전 사령관이었던 아데마르 주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가슴속에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바임베르트 주교는 보에몽과 예루살렘을 차지할 계략을 짠다.
십자군을 이끈 제후들 중 예루살렘의 통치자로서 레몽 백작이 가장 유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레몽 백작은 인심을 얻지 못했다.
아마도 '롱기누스의 창'과 관련해서 선동에 가담해서 였을거다.
그리고 고드프루아. 고드프루아는 영주로서 성공하지 못했으며, 감각이 둔하고 나약한 면도 많았다.
하지만 지휘관들은 회의를 통해 고드프루아를 1대 통치자로 선출했다.
상대적으로 다른 제후들의 견제를 가장 적게 받은 사람이 고드프루아였기 때문일 것이다.
보에몽과 계략을 짠 바임베르트 주교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고드프루아을 노골적으로 압박해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요구한다.
기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나온다.
함께 피를 흘리고 싸운 사람이 버젓이 있는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바임베르트 주교가 특사로 와서 통치권을 요구하니 불만이 터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이 상황이 보에봉의 계략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사람들은 보에몽에 대한 반감까지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고 보에몽과 관계를 가진 이들은 모두 보에몽에게 배신을 당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약속을 가볍게 여기고 신의를 내팽개쳤다.
이렇게 보에몽에게 당한 사람들이 보에몽에게 개기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서의 암투와 보두앵의 출현
예루살렘에서는 서로 믿지 못하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고드프루아 공작이 잡자기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많은 이야기가 있다.
과로로 죽었다는 이야기, 역병으로 죽었다거나 화살에 맞아 피살되었다는 이야기, 한 팔레스타인 귀족이 바친 독이 든 과일을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른다. 아무튼 고드프루아 공작이 갑자기 숨을 거둔 것이다.
이 사건으로 당황하는 사람이 바로 바임베르트 주교였다.
보에몽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힘에 의한 시위로 통치자 자리를 넘겨 받을 생각이었는데 고드푸르아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바임베르트는 십자군끼리의 내전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바임베르트는 이 소식을 모르고 있는 보에몽에게 밀사를 보낸다.
하지만 밀사는 이런 꿍꿍이를 눈치 챈 레몽 백작에게 죽임을 당한다.
밀사의 죽음으로 예루살렘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던 보에몽은 무슬림 마을을 습격해 노략질을 일삼다가 무슬림의 습격으로 산 채로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오매불망 보에몽을 기다리는 바임베르트 주교는 마음이 타 들어갔다.
바임베르트가 보에몽의 군대를 기다리는 그 때, 그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이었다.
보두앵이 군대를 이끌고 도시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그를 열열히 환영했다.
바임베르트는 상황을 눈치 채고 보두앵에게 통치자의 자리를 넘겨준다.
증원 십자군의 전멸과 보에몽의 몰락
그 무렵 서방에서 출발한 강력한 증원군이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었다.
증원군은 보에몽을 구출하려 했지만 실패한다.
바로 안티오키아 술탄이었던 클라치 아르슬란과 투르크 기병대 때문이었다.
과거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 지도자들이 십자군 전쟁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클라츠 아르슬란을 돕기 위해 군대를 지원했던 것이다.
이렇게 증원군은 아르슬란의 군대에 전멸을 당하고 이 우울한 소식은 보에몽에게 전해진다.
보에몽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생각으로 자신의 조카인 탕크레드의 구원을 기다렸다.
하지만 보에몽의 석방을 반대하고 방해한 인물이 바로 그의 조카인 탕크레드였다.
그가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을 차지하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오랜시간 감옥 생활을 하던 보에몽이 풀려나고, 조카인 당크레드에게 자신의 원정사업을 지원해달하고 요청한다.
1104년 보에몽은 '하란 전투'에서 패한 뒤 홀로 조용히 어디론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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