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삼국지 인물 이야기

유비와 공손찬의 스승, 황건적의 난을 평정한 노식

오늘도 웃는하루 2024. 5. 3. 11:49

삼국지에는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물들이 많다.

황보숭은 문무를 겸비했지만 장수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노식은 학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맡은바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며 관직에 대한 욕심도 없고 세상의 이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 노식이다.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할 때 홀로 아니라고 대답할 줄 알았던 인물.

자신의 제언이 거절당할지라도 충심을 담아 제언한 인물.

한나라 말기 황보숭과 함께 황건적의 난을 평정한 인물.

노식의 삶을 들여다 보자

 

노식. 출처 : 나무위키


노식, 문무를 겸비한 삼국지 인물


노식은 유주 탁군 탁현 출신으로 신장이 8척 2촌으로 목소리는 종소리처럼 청하했다고 한다.

노식은 유명한 유학자인 마융 밑에서 학문을 배웠는데, 마융은 특이한 방식으로 제자들을 평가하는 인물이었다.

제자들 앞에 여창을 세운 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하여 제자들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노식은 그들에게 눈길 조차 주지 않았기에 마용은 그가 제자임에도 공경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노식은 성품이 강직하고 큰 절개가 있었고 여러 학문에 능통하고 연구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애초에 노식은 주군으로부터 수차례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다가 건년(168~172년)중에 박사로 임명되며 처음으로 관직에 오른다.

희평 4년(175년) 구강의 만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노식이 문무를 모두 겸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구강태수로 임명하고 출병을 명했다.

노식은 출병하여 맡은바 임무를 다하며 만족을 물리친 뒤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관직을 그만 둔 노식은 후학을 양성하는 활동을 했는데, 이때 유비와 공손찬이 노식의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남쪽 지역에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구강에서의 경험을 가진 노식을 적임자로 여겨 그를 여강태수로 임명했다.

노식은 이렇게 다시 벼슬생활을 시작했고 이번에는 중도에 그만두지 않고 직무를 잘 해내며 계속 승진하여 결국 상서의 자리까지 오른다.


노식, 황건적의 난과 수난시대

 

184년 증평원년(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수많은 관리들이 죽임을 당하고 백성들이 약탈당하며 천하가 혼란스러워 지자 조정에서는 노식을 북중랑장에 임명하며 황보숭, 주준과 함께 황건적 토벌을 명한다.

황보숭과 주준이 영천의 황건적들을 공격하기 위해 떠났을 때 노식은 장각의 본대와 맞붙는다.

노식은 장각군과의 연이은 교전에서 승리하며 장각을 패퇴시켰고 이때 목을 벤 적의 숫자만 만 여명이었다고한다.

결국 장각은 계속된 패배에 광종 지역으로 달아나 수비에 임했고, 노식은 광종을 포위한 뒤 진영을 쌓고 참호를 파며 운제를 만들어 황건적을 뿌리 뽑을 준비를 한다.

이때 적의 형세를 관찰하여 영제에게 보고하라는 명을 받고 좌풍라는 환관이 찾아왔다.

하지만 좌풍은 적의 형세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뇌물을 걷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강직한 품성을 가진 노식은 이를 거절한다.

황궁으로 돌아온 좌풍은 황제에게 노식을 음해하는 거짓 보고를 올린다.

황건적들을 쉽게 격파할 수 있는데, 노식은 진영을 지키며 병사들을 방치하여 하늘이 황건적들에게 천벌을 내려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영재는 분노하였고, 노식을 불러들여 징계를 한 뒤 죽음만은 면하게 해준다.

이후 노식의 뒤를 이어 동탁이 오지만 장각의 본대에 패배하였고, 뒤이어 황보숭이 와서야 장각의 본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이렇게 황보숭의 활약으로 황건적의 난은 종식되었다.

황보숭은 노식이 장수로서 수행한 것들과 그의 계책을 몹시 칭송하며, 노식의 복직을 도왔고 노식은 황보숭의 도움으로 다시 상서에 복직될 수 있었다.


노식, 충심을 담은 제언들이 거절당하다

 

예전에 영제의 장인이자 대장군이었던 두무가 조정의 논의를 거친 뒤 제후로 봉해지게 되자, 노식은 두무에게 제후직을 받으면 안된다는 글을 올렸으나 두무는 노식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화 원년(178년)에 일식이 있었는데, 당시 일식은 좋지 않은 징조로 여겨졌기에 일식이 일어나면 삼공 중 하나인 태위를 면직시킬 정도였다.

이에 상서였던 노식은 오히려 흉난을 진정시키기 위해 당고의 금으로 면직된 사대부들을 사면하라고 간언했지만 영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제가 붕어한 뒤 대장군 하진이 십상시들을 제거하기 위해 병주목 동탁을 불러들이려 할 때였다.

노식은 동탁이 흉악하고 사나워 제어하기 어렵기 때문에 훗날 근심이 될 것을 알아 동탁을 불러들이는 것을 강력히 만류하였으나 하진은 따르지 않았다.


노식, 무소불위 동탁을 견제하다

 

노식의 예상대로 권세를 잡은 동탁은 사람들을 능멸하고 학대하는 행동을 일삼으며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무서운것도 없고 거칠것도 없는 동탁은 마침내 황재 페립 문제까지 꺼낸다.

조정의 대신들을 불러모아 진류왕(헌제)를 옹립하려 했다.

자리에 있던 신하들은 감히 동탁에게 반대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식이 나서서 반대하자 동탁은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를 파했다고 한다.

 

동탁은 노식의 발언에 분노하며 그를 죽이려 했다.

당시 노식과 친하게 지내던 채용이 동탁에게 노식을 죽이면 안된다고 말렸다.

게다가 의랑 팽백 또한 동탁에게 노식은 유학자로서 다른 이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 죽이면 백성들이 동탁을 두려워 할 것이라며 말렸다.

그래서 동탁은 노식을 죽일 생각을 접고 그의 벼술만 면직시킨다.

겨우 목숨을 구한 노식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아직 완전히 화를 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노식의 예측대로 동탁은 노식에 대한 분노를 쉽게 접을 순 없었는지 사람을 보내 그의 뒤를 쫓게 했는다.

노식은 이를 대비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따돌렸다.

이후 노식은 상곡에 숨어 지내며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지내다 기주목 원소의 요청으로 그의 군사가 된다.

하지만 큰 활약 없이 지내다 초평 3년(192년)의 눈을 감는다.

그가 남긴 유언은 자신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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