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럽역사 이야기

이슬람의 탄생과 유대인의 갈등

오늘도 웃는하루 2024. 3. 2. 17:22

이슬람(팔레스타인인)과 유대민족(이스라엘)은 형제

 

이슬람 국가인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의 이스라엘이 전쟁중이다.

아니 팔레스타인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진행중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슬람(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이스라엘)은 한 형제였다.

이슬람과 유대인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스라엘의 폭격, 절규하는 팔레스타인

 

기원전 2100년 경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 땅에 이사를 해서 살게된다.

아브라함의 아내의 이름은 '사라'.

그러나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어느날 아브라함은 사라의 여종인 '하갈'과 잠자리를 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

그 아들의 이름이 '이즈마엘'이다.

사라는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하갈의 아들이 이즈마엘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브라함은 이즈마엘을 금이야 옥이야 이뻐한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다.

본 부인 사라의 나이 100세 때 아들을 낳게된다.

이 아들의 이름이 '이삭'(영어식 발음으로 '아이작')이다.

상황이 달라진 사라. 이즈마엘을 장남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하고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이때부터 본 부인 사라와 하갈의 갈등이 시작된다.

 

사라는 아브라함에 매일 같이 시위를 벌인다.

이삭이 적장자이기 때문에 모든 재산과 족장의 자리를 이삭에게 줘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고민에 빠지고 기도를 한다.

그때 아브라함에게 신의 음성이 들린다.

"하갈과 아들 이즈마엘을 사막을 내 보내라"라는 계시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어쩔수 없이 신의 계시라는 이유로 그 두 사람을 내 쫒는다.

 

그렇게 쫒겨난 두 사람이 사막에서 먹을 것도 없이 죽어갈 때 쯤 다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바로 사막에서 샘물이 솟아난 것이다.(이 샘을 '잠잠'이라 불렀다.)

그리고 신이 나타나 이즈마엘도 큰 나라와 민족을 이룰것이라는 음성을 듣게된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이즈마엘의 후예는 아랍인이 되고, 이삭의 후예는 유대인이 된다.

 

결국 아랍 민족과 유대인은 형제이고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은 뿌리가 같은 종교인 것이다.

이 두 형제가 지금 팔레스타인 땅을 두고 이렇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싸움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은 본처 아들이 첩의 아들(형)에게 깡패를 데리고 와서 집을 비우라고 난동을 부리는 상황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이슬람의 탄생은 평화와 평등의 시작

 

그 후로 2000년이 흐르고 메카에 무함마드가 살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고아로 자랐지만 자수성가로 성공한 상인이 된다.

어느날 지브릴(가브리엘)이 그에게 나타나 신의 말씀을 전하기를...

'외롭고 약한 사람들을 위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라'는 내용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대중들이 그의 말에 지지하게 된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당시 메카의 지배세력은 탐탁지 않아했으며 위협을 느끼게 되면서 무지막지한 탄압을 하게된다.

무함마드는 저항을 하기로 하고 이웃 도시인 '야스리브'로 옮겨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서 메카의 지배세력과 싸우기 시작한다.

 

무슬림과 메카의 지배세력간 전투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자식을 잃은 메카의 지배층의 원한을 사게된다.

무함마드의 삼촌이 전사했을 때 그의 시신의 배를 갈라 간을 먹었다는 귀부인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원한이 깊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진 탄압에도 잘 버티던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에게 제안을 한다.

그것은 바로 메카로 평화순례를 가자는 것이었다.

무슬림들도 다들 당황하였고, 메카에 있는 적대적인 사람들도 당황하였다.

처음엔 어찌어찌해서 막았는데 다음해 또 다시 순례단이 들어오니 메카 지도층은 어쩔 수 없이 평화협정을 맺게 된다.

지배층의 박해가 누그러지자 무슬링의 숫자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대접 받고 살 수 있는 사회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내용이니 민중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

마치 우리 나라에서 일어났던 '동학'처럼 말이다.

아무튼, 당황한 메카의 지배층(무슬림 반대자)들은 평화협정을 위반하면서까지 폭력을 휘둘렀으며, 무함마드도 무력시위를 벌였고 반대자들은 무함마드의 위력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메카를 정복함으로써 무함마드는 선지자라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무혈 혁명이고 평화주의 정책이 가져온 결과였다. 그러한 평화 정책은 무함마드의 적대적인 사람들까지 무슬림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무함마드의 죽음과 이슬람의 확장

 

메카를 장악하고 성지 순례를 통해 평화와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하는 이슬람 사람들.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으면서 이슬람의 비극은 시작된다.

 

후계자를 어떻게 뽑을 것인가를 놓고 갑론을박.

무함마드의 집안에서 후계자를 뽑아야 한다는 쪽이 시아파.

무슨소리냐?? 집안이 중요한게 아니라 이슬람의 근본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쪽이 수니파.

내부에서 서로 갈등을 빚게된다.

 

아무튼 이슬람의 명망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후계자를 뽑는다.

이것을 갈리파라고 한다.

네 명의 정통 갈리파는 아부 바크르(632~634년), 우마르(634~644), 우스만(644~656), 알리(656~661) 이다.

 

통일된 아랍의 힘은 대단했다.

30년도 안되서 동로마 제국의 많은 영토를 정복했고, 이란 제국의 사산 왕조는 멸망하게 된다.

사실 군사력만 가지고 보면 이슬람은 로마를 이길 수 없다.

로마가 통치하고 있던 지역의 주민들이 로마에 대한 불만이 많아서 이슬람을 반겼을 수 있다

 

그렇게 억눌리던 백성들이 이슬람을 반긴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

둘째, 이슬람의 평등 사상이다.

셋째,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다른 문화권 보다 여성의 권리를 보장했다.

 

초창기 이슬람은 인권 존중을 가장 기본적인 교의로 삼았다. 그러나 세월지 지나면서 권력자들에 의해 사회 정의와 인권에 대한 억압의 역사가 시작된다. 지금의 이슬람 정부 대부분은 여러가지 이유로 독재와 비 민주적인 정부를 운영하고 있는 현실이다.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의 분열

이슬람의 4대 갈리파 '알리'.

그는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최초의 이슬람 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갈리파 즉위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무함마드의 부인 '아이샤'였다.

그녀가 알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

알리는 그녀를 힘겹게 진압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메카의 기득권이며 한 때 무슬림을 탄압했던 귀족 집안의 아들인 '무아위야'가 시비를 걸어왔다.

그의 어머니가 무함마드의 삼촌이 죽었을 때 그의 배를 갈라 간을 먹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무아위야와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은 알리.

그러나 무아위야가 휴전 제의를 하고 알리 지지자들 사이에서 강경파와 온건파의 내분이 일어난다.

결국 알리는 휴전을 위한 협상에 나서게 되고, 강격파는 불만을 품고 알리를 암살한다.(661년)

이렇게 갈리파 자리는 무아위야의 집안으로 넘어간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했던가.

무아위야는 알리의 지지자들을 탄압한다.

그리고 독재를 시작하게 된다.

 

무아위야는 자신이 총독을 하던 다마스쿠스로 수도를 옮겼다.

갈리파 자리도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줬다.

선출로 뽑던 전통이 사라지게 되었고, 우마위야 가문이 권력을 세습하는 군주 국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무아위야가 갈리파 자리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리의 장남이 죽는데(669년) 무아위야가 암살했을거라는 뒷말이 무성했다.

그리고 680년 알리의 차남 후세인이 이라크 땅에서 지지세력을 규합하던 중 가족과 함께 학살당한다.

이들이 바로 시아파. 시아파의 탄압은 한동안 계속된다. 이렇게 수니파는 이슬람의 주류로 자리 잡는다.

압바스 가문은 우마위야 집안을 멸족시키고 갈리파 자리를 차지했다.

이렇게 이슬람은 분열을 거듭한다.

 

피의 예루살렘, 통곡의 이슬람 민중

 

수피나 내부의 혼란과 갈등으로 어지러울 때.

시아파 무슬림은 불편한 시절을 보내다가 909년 북아프리카 지역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 그들 스스로를 '타피마'의 후예라고 불렀다,

파티마는 무함마드의 딸이자 알리의 아내였다.

훗날 카이로에 수도를 건설하고 압바스의 갈리파와 경쟁을 했으며, 수니파가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정복하기도 했다.

물론 1년도 지나지 않아 집자군이 몰려들면서 빼앗기긴 하지만.

 

십자군이 몰려들었을 때 이슬람은 왜 그렇게 비참하게 당했을까?

이슬람 내부의 분열 때문이라는게 거의 정설이다.

첫째, 바그다드의 압바스 가문엔 갈리파라는 이름만 남았지 그를 중심으로 뭉치지 않았고 권력은 투르크족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둘째, 거기에다 셀주크 투르크는 계승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다.

셋째, 다마스쿠스 등 지방에서는 군벌들이 나라를 세워 서로 싸우고 있었다.

넷째,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수니파가 십자군의 공격을 받을 때 시아파는 딴 생각을 했다. 수니파가 당하는게 시아파에게 기회가 될 거라는 생각까지 했다.

 

이러니 예루살렘을 지킬 수 있을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주변 국가들은 모두 이슬람 국가이지만 예루살렘을 빼앗을 엄두를 못냈다.

서로 단합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이슬람국가의 십자군에 대한 반격은 어제 어떻게 이루어질까...

다음 포스팅에서 할 생각이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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